네로가 죽은 후에 68년, 69년 약 2년간 4번의 황제가 탄생한다. 진짜 믿지 못할 수도 있지만 로마에서는 일어났다…

로마인 이야기 8편 - 갈바, 오토, 비텔리우스 황제

네로 황제가 죽은 후 갈바라는 70대 노인이 황제에 등극했다. 갈바는 귀족출신이었고 정치적인 권위도 정말 높았기 때문에 아우구스투스의 핏줄이 아니더라도 황제가 되는데에는 무리가 없었다. 하지만 이 갈바는 로마에 빠르게 귀환하지 않고 천천히 귀환했다. 하지만 인선(사람을 뽑아 배치)에 있어 큰 실수를 저질렀다. 아마 사람보는 눈이 없었던 것 같다. 오토라는 인물이 갈바를 적극적으로 지지했지만 갈바는 오토에 눈길을 주지 않았다. 이에 오토는 배신감을 느꼈다. 이후 오토는 갈바를 잇는 황제가 된다. 또한, 로마에 있어 가장 중요한 존재는 바로 군인과 원로원, 시민들이다. 비니우스라는 인물을 집정관으로 선택함으로써 병사들과 원로원의 신뢰를 잃었다. 그리고 황제가 되면 시민들에게 보너스를 나누어 주었는데 이 또한 무시했다. 결국 최전방에 있던 장병들은 반기를 들었다.

갈바는 황제가 되기에는 나이가 너무 많았다.
로마라는 큰 제국을 다스리려면 그 만큼 열정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갈바는 남은 여생을 편안하게 끝내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이렇게 게르마니아 전선에 있던 장병들이 비텔리우스라는 인물을 지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로마에서 갈바는 피소를 자신의 양자로 삼았다. 피소는 ‘피소 음모’의 그 피소였다. 이에 시민들에게 완벽히 신뢰를 잃게 되었고 오토의 배신으로 갈바는 죽게 된다.

오토는 네로에게 아내를 빼앗긴 인물이다. 이 오토는 변방의 속주 통치자로 보내졌다. 오토는 그래도 능력이 있는 인물이었다. 변방을 잘 통치했고 군단을 다루는 솜씨도 훌륭했다. 그래서 작가는 평화로운 시기에 황제에 등극했다면 꽤나 좋은 정치를 했을 것이라고 했다.

아쉽게도 이 오토는 바로 황제에 등극하게 되지만 그 기간은 고작 3개월이다. 이 과정에서 정말 재미있는 일이 있다면 각 지역에서 일어난 소식이 로마나 다른 지역에 도달하려면 오랜 기간이 걸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비텔리우스가 반기를 들었을 때 오토는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리고 비텔리우스 역시 갈바가 죽고 오토가 즉위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단지 이후 황제에 등극하는 베스파시아누스의 아들 티투스만 이 소식을 우연히 중간에서 접하게 된다. 이런 시간의 오차는 오토에게 준비의 기간을 주지 않았다. 라인 군단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고 있고 자신에겐 군대가 없었다.

이 때는 1분 1초도 걸리지 않을 소식이 기후 변화나 지형때문에
몇 일, 몇 달씩 걸렸기 때문에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니...
헛웃음이 나온다.
어떤 일이든 타이밍이 중요하다. 라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이런 위기의 상황에서 ‘라인 군단’의 라이벌인 ‘도나우 군단’이 오토를 지지했다. 그래서 결국 이 두 군단은 베드리아쿰에서 무력 충돌을 하게된다. 결과는 ‘라인 군단’의 압도적인 승리였다. 그 이유는 오토가 직접 총 사령관으로 참여하지 않아 병사들의 사기에 큰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같은 동족끼리 서로 죽여야 하는 상황에서 총 사령관의 부재는 큰 문제였던 것이다.

제 1차 베드리아쿰 전투 전에 '도나우 군단'은 계속 이겼다.
이 때문에 오토는 자만했던 것일까?
왜 꽤나 뛰어난 능력을 가져놓고는... 그 능력을 활용하지 않았을까?
누구에게나 기회는 주어진다.
이 기회를 잡기 위해서는 항상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교훈을 주는 것 같다.
동족끼리 싸워야 하는 느낌은 어떤 것일까? 내가 친한 친구랑 싸우는 느낌일까?
서로를 죽이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 겪어보지 않아 모르지만 마음이 너무 아플 것 같다.

이렇게 패배한 것을 안 오토는 자살했고 비텔리우스가 황제에 등극하게 되었다. 정말 웃긴 것은 황제가 죽을 때마다 원로원은 공화정을 원하는 사람들 처럼 보이지 않는 행동을 했다는 것이다. 계속 유리한 쪽에 다음 황제를 임명했다는 것이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 딱 이 속담에 맞아 떨어지는 것 같다.
원로원은 1인 지배를 극도로 싫어하고 배척하며 비판했다.
하지만 행동은 항상... 황제의 의견에 복종했고 황제없는 기간을 원하지 않았다.
책임 전가의 문제일까? 껍데기 뿐이라는 것을 인정한 것일까?
그들끼리도 의견 일치를 보지 못한 것일까? 이해는 한다.
카이사르 이후로 원로원의 구성은 귀족뿐만 아니라 다른 속주 출신의 사람도 포함되었다.
아무리 그래도 불만만 가지고 행동하지 않는 모습... 안타깝다.

비텔리우스는 손쉽게 황제에 등극했다. 하지만… 그 역시 부족함이 많았다. 카이사르가 폼페이우스와 싸울 때 잡은 동족 포로들을 모두 풀어주고 자유롭게 선택할 기회를 주었다. 이에 반해 비텔리우스는 ‘도나우 군단’에게 큰 치욕을 주는 행동을 했다. 또한, 황제의 근위병 역시 모두 해고했다. 이로 인해 큰 민심도 잃게 되고 불만을 가진 사람도 많아졌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라는 속담이 있다.
황제에 등극했으면 그 지위에서 가추어야 할 겸손을 갖추어야 했다.
저런 대처는 정말 오만함에 생각이 짧다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다.
싸워서 이기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정말 이기면 무조건 기쁠까?
패한 상대가 내 친구라도? 내가 아는 사람이라도?

이런 상황이 진행되는 동안 시리아 총독 무키아누스, 베스파시아누스, 알렉산드로스 이 세명은 서로 의견 합의를 보고 베스파시아누스를 황제로 등극시키기로 결정하게 된다. 이들은 치밀한 전략을 짜게 된다. 일단 무키아누스는 유대에서 서쪽을 지나 로마로 쳐들아기로 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이집트에 있으면서 유대와의 전쟁의 마지막을 돕거나 로마를 공격하는 무키아누스와 다른 방향으로 합류하기로 했다. 마지막으로 알렉산드로스는 유대를 공격하는 티투스를 돕기로 한다.

무키아누스가 서쪽으로 이동할 때 ‘도나우 군단’은 이때가 기회다라는 듯 먼저 로마로 쳐들어가기 시작했다. 이 ‘도나우 군단’의 공백을 다행히 무키아누스가 채울 수 있어서 빈집털이를 노린 다키아 족을 막을 수 있었다.

제 2차 베드리아쿰 전투에서는 ‘도나우 군단’이 압승을 했다. 일단 복수심에 불타오른 도나우 장병들… 그리고 지휘체계의 통일이었다. 이 때 지휘를 맡은 사람은 안토니우스 프리무스였다.

이렇게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 ‘도나우 군단’은 무키아누스가 올 때까지 기다렸지만 다키아 족과 전쟁 중이었기에 안토니우스는 직접 로마로 가기로 결정한다. 비텔리우스의 동생은 끝까지 로마에서 안토니우스를 기다리며 싸우지만 결국 죽고 비텔리우스 역시 포로가 되고 죽음을 맞이한다.

되려고 하면 어떻게 해도 된다. 라는 말이 생각난다.
딱 그런 느낌인 것 같다. 로마 공격을 위해 움직였는데...
손하나 쓰지 않고 로마를 얻었으며 그 중간에 적군의 침입도 막았다.
세 사람 모두 이 판을 예측하진 못했을 것이다. 그저 운이 좋았을 뿐.
하지만 그 기회도 잘 준비해야 잡을 수 있다고 한다.
티투스가 갈바의 죽음, 오토의 황제 등극, 비텔리우스의 반란.
이 세 소식을 듣고 아버지인 베스파시아누스에게 전했고 항상 적절한 입장을 취한 덕이 아닐까?

이후 베스파시아누스는 황제에 등극하고 위기의 로마를 안정시켜 나가게 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