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스파시아누스와 티투스를 통하면서 위기를 극복해 나가는 로마. 과연 갑작스런 황제가 된 티투스의 동생. 도미티아누스는 어떤 황제일까?

로마인 이야기 8편 - 도미티아누스, 네르바 황제

도미티아누스는 ‘기록말살형’에 처해진 황제 중에 한 사람이다. 이 형에 처한 황제는 네로가 있다. 사실 도미티아누스와 네로를 비교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러면 왜 도미티아누스는 ‘기록말살형’에 처했을까?

도미티아누스는 어린나이에 아버지가 황제에 등극했고 그래서인지 형 티투스와는 다르게 귀족적인 모습을 갖추려고 노력을 많이 했다. 그리고 형과 다르게 잘생기고 덩치도 컸다. 아내도 유명한 코르불로의 막내 딸과 결혼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티투스가 이렇게 일찍 죽을 것을 생각하지 못해서 도미티아누스에게는 아무런 경험을 시키지 않았다. 정치 경험, 군사 경험 이 모든 것이 부족한 상태였다.

사람의 운명은 알 수 없는 것 같다.
도미티아누스는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황제가 됐다. 꼭 칼리굴라와 네로같이...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우두머리의 역할을 맡으면 무너지기 쉽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그런데 도미티아누스는 생각보다 오랜 기간 로마를 다스렸고 후대 황제의 안정적 로마 운영에 기여했다.
어떻게 그는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도 로마를 잘 다스릴 수 있었을까?

도미티아누스의 가장 큰 업적은 게르마니아 방벽을 세운 것이다. 하지만 당시에 원로원과 시민들은 이 방벽을 이해하지 못했고 도미티아누스가 전쟁 경험이 없는 것을 비난했다. 하지만 이 방벽은 나중에 트라야누스에 의해 완성된다. 그만큼 중요한 방벽이었다.

도미티아누스는 매우 꼼꼼한 성격이었고 질서 정연한 것을 좋아헀다. 그래서 모든 법을 엄정하게 집행하고 항상 공정하게 일을 집행했다.

도미티아누스는 당연히 황제이기에 공공사업으로 다양한 것들을 했다. 스타디움, 콜로세움 그리고 네르바 포룸이다. 사실 도미티아누스 포룸인데 기록말살형을 당해서 대부분의 이름이 바뀌었다. 그리고 다양한 지역의 수도 공사. 로마는 당시 수도 공사가 워낙 잘 되어 있어서 물이 부족한 지역이 없었다. 하지만 다른 지역은 그렇지 않았는데 도미티아누스는 이러한 곳에 수도 공사를 했다. 마지막으로는 도로 공사다. 로마는 도로 공사에 항상 집중을 했고 이로 인해 로마에서 어느 속국으로 가든 빠르게 갈 수 있다. 오늘날의 고속도로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아직도 이 도로들을 고속도로로 사용하는 국가가 많다. 이 도로망은 속국들의 로마화를 이끌어 낸 주 요인 중에 하나이다.

브리타니아, 게르마니아 방벽을 세운 지역은 아직 제패하기 전이라 언제든지 로마에게 큰 위협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브리타니아보다 게르마니아 지역이 더 위험했고 도미티아누스는 브리타니아 제패를 멈추고 게르마니아 방벽을 완벽히 세우기 위해 이 지역에 군단을 집중시켰다. 이 후 다키아 전쟁이 일어나는데 군사적 능력이 없던 도미티아누스는 패배한 후 평화 조약을 맺는다. 이로 인해 또 한 번 원로원과 시민들의 비난을 사게 되었다.

황제는 원로원도 만족시켜야 하고 시민도 만족시켜야 한다.
사람은 한 명이고 모든 것을 완벽히 처리할 수 없다. 그래서 다름 사람을 잘 다뤄야 한다.
다시 한번 적재 적소에 사람을 배치하고 사람보는 눈을 키워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능력을 키우기 위한 방법은 무엇일까...?
나의 행동을 알아주길 바라면서 하는 것은 아니지만 욕을 먹는 경우는 많다.
하지만 나중에 그 행동의 의미를 알아주는 사람이 분명 나온다.
누군가의 말처럼... 적을 만드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는 것도 중요한 것 같다.

도미티아누스는 ‘델라토르’. 즉, 고발자 제도를 적극 활용했다. 또한, 점쟁이와 그리스 철학자들이 많이 죽었는데 이로 인해 공포정치라고 불리게 된다. 그리스 철학자들은 카이사르의 정책(교육, 의료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로마 시민권 부여)에 의해 세력이 많이 약화되었다. 즉, 이에 대한 불판을 표출했기 때문에 많이 죽었다.

도미티아누스는 그의 아내를 모시는 해방 노예에게 살해당했다. 정확한 이유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도미티아누스와 조카딸의 불륜과 폭정에 의한 것이 아닐까? 라고 추측하고 있다.

오늘날에는 거의 일어날 수 없는 일이지만... 이 때 황제에 등극하면 힘들었을 것 같다.
항상 불안한 상태에서 잠을 청해야 하고 항상 주변에 호위를 받으면서 살아야 한다.
모든 권력은 집중되어 있지만 그 만큼 자유롭지 못하다.
정말 아이러니하다.

이후 집정관인 네르바가 황제에 오른다. 그는 나이가 70대였다. 그는 항상 중립적 입장을 취했다. 반도미티아누스파도 아니었고 친도미티아누스파에게도 아무런 보복을 하지 않았다. 이런 소극적 자세가 위험해 보였지만 그는 트라야누스를 자신의 후계자로 삼음으로써 이를 극복했다. 네르바는 2년 후 죽지만 트라야누스를 양자로 삼은 것이 가장 훌륭한 판단이라고 알려져 있다.

드디어 '오현제'의 시대가 나온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로마 당대 최고의 황제라는 '트라야누스'. 카이사르보다 뛰어날까...?

9권은 오현제 시대에 대한 내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