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편은 로마의 인프라에 대한 내용이 전부이다. 작가는 이 인프라를 통해 로마인이 생각한 ‘공’과 ‘사’에 대한 사고방식을 풀어나가려고 한다. 과연 이 인프라는 로마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로마인 이야기 10편 - 가도와 다리

하드웨어 인프라는 크게 가도와 다리 그리고 수도가 있다. 여기서는 가도와 다리에 대한 부분과 내 생각을 쓰려고 한다.

고대에는 전쟁을 통해 상대를 정복하고 국가를 지켜야 했다. 로마는 이 전쟁에서 국가를 지키기 위해 가도를 만들었고 비슷한 시기에 중국은 만리장성을 쌓았다. 이 사실만 봐도 동양과 서양의 사고방식을 알 수 있다. 로마는 방어를 위해 ‘가도’를 통해 커넥션을 더 활발히 증가시켰고 중국은 ‘성’을 쌓으면서 커넥션을 단절시켰다.

저 내용을 본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정말 생각지도 못한 접근이었고 내용이었다. 그리고 너무 마음에 와 닿았다.
우리는 항상 서양은 개방적, 동양은 폐쇄적이라고 이야기한다.
동양은 고대부터 폐쇄적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도대체 동양은 폐쇄적일 수 밖에 없었을까? 답을 찾고 싶다.

가도를 처음으로 생각하고 개발한 사람은 아피우스 클라디우스라는 인물이다. 이 때가 기원전 312년이다. 이 사람은 최초의 수도를 생각하고 개발한 사람이기도 하다. 아직도 의문은 도대체 아피우스는 무슨 생각으로 가도를 만들 아이디어를 생각했냐는 것이다.

기원전 312년이면 지금부터 2300년 전이다. 그는 이 때 지금과 비슷한 길을 생각했다.
왜...? 왜...? 국가의 크기도 크지 않은 상태였고 충분히 사람들이 지나다닌 길이 있었다.
아무도 불편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왜...?
아무리 생각해도 그 해답은 작가가 못 찾았듯이 나도 모르겠다.
정말 희대의 천재라는 것인가? 그런 천재는 로마 역사상 두 사람이 있다.
바로 아피우스 클라디우스와 율리우스 카이사르다.
그런 생각의 근원은...
로마를 사랑하고 발전하는 모습을 위해 끊임없이 생각한 것은 아니었을까? 라고 생각해 본다.
아피우스는 로마가 그리스에게 고전하고 있을 때 패배를 인정하려는 분위기인 원로원들 앞에 나타났다.
그리고는 크게 화를 냈다고 한다. 그의 로마 사랑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내가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에 집중하면 하루 종일 더 나은 방향만 생각한다고 한다.
바로 이런 느낌이 아니었을까? 예상해 본다.

로마의 가도는 폭이 10m ~ 12m였다. 길 양 옆에 인도가 3m씩 있다. 길의 폭인 4m ~ 6m는 지금 2차선 도로의 너비정도이다. 지금의 포장도로만큼 완전 평평하지는 않지만 최대한 평평하고 포장된 느낌의 도로로 만들었다. 100년이 지나도 보수할 필요 없을 정도로 만들었다고 로마인들은 생각했으나 800년이 지나도 멀쩡한 도로를 보고는 중세 시대 사람들이 놀랐다고 한다. 로마 시대의 수많은 가도들은 지금도 고속도로, 국도로 많이 사용되고 있다. 로마가 대부분의 유럽지역에 가도를 깔았고 그 가도들이 활용되고 있다는 건 옛 가도 지도와 현 도로 지도를 봐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정말 웃긴 것은 이 때 인도와 수레, 마차 도로를 구분했다는 것이다.
이들의 의식 수준은 이미 당시 동양과는 너무 크게 차이가 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가도의 주목적은 국가를 방어하기 위한 것이다. 더 빠르게 수송할 수 있는 체계.
이 체계가 바로 로마가 적은 군단으로 그 넓은 나라를 통치하고 방어할 수 있는 이유였다.
사실 서양을 너무 칭찬하는 느낌이 들지만... 팩트는 팩트이다.
그리고 지금도 그 길을 사용한다는 뜻은 그 길이 최적화 된 길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다리는 가도의 연장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로마인들은 가도의 형태 그대로 다리로 연결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다리를 만들 때에도 너비는 거의 비슷하게 만들었다. 대신 다리에 각각의 개선문과 같은 큰 문을 만들기도 했고 장식들도 넣었다. 그러면 과연 로마인들은 어떻게 다리를 만들었을까?

늪에서는 자갈, 나뭇가지 등을 연속적으로 쌓고 위에 덮개와 비슷한 것으로 덮어서 건넜다. 강을 건널 때에는 배다리와 나무다리를 이용했다. 배다리는 배를 연결해놓고 그 배에 널판지를 이용해 연결한 다리이며 나무다리는 나무로 만들었고 수압이 약하고 잠깐 사용할 다리인 특징이 있다. 이후 돌다리가 나왔는데 이 돌다리의 규모는 어마어마하다. 로마인은 1135m 길이의 돌다리를 만들었다.

이 다리들은 배수처리가 중요했는데 완만한 아치형으로 만들었으며 인도와 수레, 마차 도로에도 배수로가 있었다고 한다.

이런 다리가 있었기에 정보 전달이나 군 이동에 지체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가도와 다리를 많이 만들면 다른 나라와 교류도 쉽다.
교류가 많은 만큼 서로 침략하기도 어렵다. 로마는 교류를 통해 국가를 방어했다.
정말 이치에 맞는 이야기이고 반박할 거리도 없다.
그냥 그들의 생각과 방법에 놀라움을 금치 못할 뿐이다.

이 가도와 다리는 대부분 군단병에 의해서 지어졌다. 가장 큰 목적이 전쟁과 방어였기 때문이다. 일반인 부터 우편부 등 다양한 사람들이 사용했지만 국가적 차원의 가도와 다리였다. 사용료도 없었고 정말 꾸준하게 유지/보수를 했다.

이런 가도의 발전은 우리나라의 휴계소와 비슷한 것을 발전시켰다. 일정한 거리마다 숙박시설과 음식점이 있었고 말도 갈아탈 수 있었다. 이런 발전은 지도를 만드는데 최적의 조건이었다. 지도에는 말로 설명한 지도와 그림으로 나타낸 지도가 있다. 이 두 지도가 함께 있어야 완벽하다고 할 수 있었다.

여행자를 위한 은컵이라는 것도 존재했는데 이 은컵에는 이동한 거리마다 무슨 시설이 있는지 표시해둔 컵이다. 이 시기에 유명한 지도는 ‘타불라 페우팅게리아나’라는 지도인데 이 지도는 위도, 경도를 정확히 따진 지도는 아니지만 최대한 기호를 사용해 로마의 가도와 시설들을 세세하게 표현했다.

로마는 이미 휴계소와 같은 개념들이 서기 200년 ~ 400년에 등장했다.
우리나라에도 파발을 위해 말을 갈아타는 시설이 있다고 들었지만... 로마처럼 체계적이었을까?
결과적으로 열거냐 막을거냐에서의 발상의 전환이 큰 변화를 만들어 냈다.
사실 그 변화를 예상하고 가도와 다리를 만든 것은 아니겠지만... 놀라울 따름이다.
항상 정답은 아니겠지만 변화로 발전할 계기가 많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

수도이야기를 보면 더 놀랍다. 이들의 뇌 구조가 정말 궁금할 정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