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후 등극한 알렌산데르 세베루스 황제는 열 세살에 황제에 등극했다. 이 황제는 그래도 약 13년간 로마를 통치하게 된다. 그는 어떤 인물일까?

로마인 이야기 12편 -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황제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황제(222년 ~ 235년)

너무 어린나이로 황제에 등극한 그는 법학자 울피아누스라는 좋은 스승을 두었고 그에 가르침을 통해 충실히 통치를 시작한다. 실제로 알렉산데르 황제는 울피아누스와 항상 붙어 지냈다. 울피아누스의 영향이었을까 알렉산데르 황제는 공정을 중시했고 모든 일에 있어 공정하게 일을 처리했다. 또한, 생활도 검소하고 수수했다.

시리아 속주에서 황제가 나왔을 때 항상 큰 역할을 한 것은 시리아 여자들이었고 그 중심에는 율리아 마이사가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죽은 후 알렉산데르의 후견인이 된 율리아 마메아는 현명하지 않은 단순한 악녀였다. 울피아누스에게 거리를 둔 마메아로 인해 울피아누스의 적들이 활개를 치게 되고 결국 2년 후 살해당하게 된다. 이렇게 6년간의 평화가 끝나게 된다.

로마의 평화는 울피아누스가 죽은 후에도 그럭저럭 잘 유지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사산조 페르시아의 탄생으로 위험해지기 시작했다. 사산조 페르시아는 알렉산드로스 대왕 이전의 페르시아 제국의 부흥을 내세우며 세워진 국가였고 파르티아와 다른 기개가 있었다. 그리고 이런 신흥 국가는 내부의 반대파를 침묵시키기 위해서 외부로 침략하는 경우가 잦았고 사산조 페르시아가 그런 국가였다.

이 페르시아 전쟁은 알렉산데르 황제에게는 처음으로 황제로서의 진가를 시험받는 자리가 되었다. 알렉산데르 황제가 어떻게 전쟁을 치뤘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남아있는 기록으로는 페르시아에 승리했다는 것이다. 그 후 원로원과 시민은 그를 라인 전선으로 보내게 된다. 이 후, 그는 파멸의 길을 걷는다.

지금까지 라인 강 근처의 게르만 대책으로는 항상 적극적인 방법을 이용했다. 즉, 단순히 침입을 막는 것이 아닌 침입을 막고 상대의 영토로 쳐들어가서 로마군의 위엄을 보여주는 식이었다. 하지만 알렉산데르 황제는 최대한 전쟁을 피하려고 강화 체결에 힘썼다. 이런 대응에 불만을 가득 느낀 군단병들이… 그를 살해하게 된다. 그래도 로마 중기까지는 군사와 정치의 중요성을 제대로 깨닫고 행동한 황제들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3세기에는 이런 통치자가 없었다.

어린 나이에 황제가 되서 통치를 제대로 못했다고 볼 수도 있지만 나는 잘 했다고 생각한다.
그 나이에 다른 사람에게 귀를 기울이고 나의 고민을 병사들에게 까지 털어놓으며 상의한 모습.
그 모습은 사실 리더의 중요한 자질 중에 하나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가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것은 너무 어렸기 때문에 결단력과 판단력이 아니었을까...?
사실 카이사르와 비교되는 이야기가 책에 나오긴 하지만...
이 부분은 아직 어렸기 때문이 아닐까...? 라고 생각한다.
황제가 어리다고 해서 비판을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닌 위치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좀 더 믿고 기다려주는 팔로워의 자세도 조금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 이후 황제들

이 후에 등극한 막시미누스 트라쿠스(235년 ~ 238년) - 고르디아누스 1세(238년), 2세(238년), 3세(238년 ~ 244년) - 필리푸스 아라부스(244년 ~ 249년) - 데키우스(249년 ~ 251년) -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251년 ~ 253년) 이러한 순서로 황제가 빠르게 변하게 된다.

막시미누스는 군인에게 추대 된 황제였다. 속주 출신이지만 지배계급과의 연고도 없었고 아버지는 양치기였다. 그는 힘이 무척 셌다. 그는 정통성이 없었기에 어떻게든 실력으로 원로원과 시민에게 인정받아야 했다. 그래서 게르만인과 전쟁에 힘썼다. 3년간 승리에 승리만을 거듭했고 북쪽 방위선의 평온을 가져다 주었다. 하지만 안토니우스 칙령 이후 모든 속주민은 로마시민이 되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속주 시스템이 적용된 지역에서 갑자기 로마시민이 된 사람들은 기존 자신들의 생활에 불만을 가질 수 밖에 없었고 갑자기 생겨난 특별세(세수 증대를 위한 방책)에 그 불만이 북아프리카에서 결국 터진 것이다.

이 때 북아프리카 지역에 황제로 추대된 사람은 고르디아누스였다. 원로원은 막시미누스를 못마땅하게 생각했기에 바로 고르디아누스를 황제로 추대했다. 막시미누스는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로마로 향했다. 이 당시 고르디아누스를 시작으로 약 1년 간 5명의 황제가 나왔다.

어쨌든 막시미누스는 전투에는 자신있었기에 로마로 회군했지만 그 주변 주민들은 이미 막시미누스를 국가의 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결국 막시미누스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병사들에게 살해당하게 된다.

지금은 정통성이 뭐가 중요하냐? 라고 생각하겠지만... 지금도 중요하다.
전에도 썼지만 인간은 차별없이는 살 수 없다. 즉, 실력이 아무리 좋아도 차별이 사라지지 않는다.
이건 사실이고 현실이다. 그러면 이 정통성 부분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할까?
내 편으로 만드는 방법? 정통성이 있는 것처럼 만드는 방법?
사실 지금도 사용되는 방법들이다. 실제로 우리가 보고 알고 있는 것 중에 정통성이 조작된 것도 많다.
이런 정통성은 옛날 전통을 계승하거나 돈 많은 사람들에게만 존재한다고 생각하는데
사실 일반 시민들 사이에서도 이런 정통성을 따지는 경우가 매우 많다.
아마 생각해 보면... 다들 몇 개씩은 있다.
그 예로 나는 학연, 지연 모두 정통성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렇게 수많은 황제들 중 남은 황제는 고르디아누스 3세였다. 그는 즉위 당시 열 세살의 어린 소년이었다. 그도 다행히 티메시테우스라는 실무 담당자를 두어서 정치를 하며 아무런 문제 없는 듯 로마의 평화를 지키려 했지만 외부의 적인 페르시아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고르디아누스 3세는 페르시아 전쟁에 참전했지만 티메시테우스가 갑작스럽게 죽게되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상황에 병사들에게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솔직히 물어보며 대처하려고 힘썼다.

하지만 이런 황제의 모습은 병사들의 마음에 조금씩 불만이 쌓이게 했고 결국 살해당하게 된다.

고르디아누스 3세가 죽은 후 등극한 필리푸스 아라부스 황제는 로마 건국 천년을 함께한 황제이다. 하지만 이 천년제와 함께 민족 대이동이라 불리는 게르만 족의 침입이 시작된다.

필리푸스 아라부스 황제는 병사들에게 큰 불만을 주었고 그 결과 자살하게 된다. 그 이유로는 먼저 페르시아와 전쟁을 하기 보다는 그들의 요구를 모두 들어주며 로마로 철수했다는 점. 두 번째는 자신이 아랍인 황제였기에 원로원에게 잘 보이려고 노력했다는 점이다. 즉, 원로원이 좋아할 만한 법을 만들기 시작했고 정치에만 신경썼다. 이러한 부분들이 병사들의 불만들 쌓이게 했고 게르만 족의 침입 후 황제가 전쟁터에 나오지 않는 모습은 이 불만이 데키우스라는 인물을 황제로 추대하는 상황까지 커졌고 필리푸스 아라부스 황제를 자살이라는 말로를 걷게 한다.

이후 데키우스가 황제로 등극하는데 그는 군사적 능력과 통치 능력도 충분했다. 하지만 그의 치세는 게르만 족이 남쪽으로 침입하는 시기와 겹친 것으로 오래가지 못하게 된다. 어쨌든 그는 황제에 오르자마자 도나우 방위선을 재편성하고 로마 사회의 규율을 회복하는데 힘썼다.

로마 사회의 규율 회복을 위해 기독교 탄압에 들어갔는데 다른 기독교 탄압과 다른 점은 모든 시민에게로 그 탄압 범위가 넓어졌다는 것이다. 리벨루스라는 증명서를 발급받아서 나는 기독교인이 아니라는 것을 모든 로마시민이 증명해야 했다. 이 때 기독교에서는 죽음에 이른다 해도 끝까지 신앙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파와 증명서 받는 정도는 용서받을 수 있다는 파로 나뉘었다. 하지만 이는 오래가지 못했다. 야만족 대침입으로 데키우스가 기독교 소탕에 정신을 쏟을 형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야만족은 이전의 야만족이 아니었다. 이제는 로마군의 전법도 알고 있었고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도 생각할 정도로 성숙해져 있었다. 데키우스는 이 야만족들과의 1년간의 전쟁에서 큰 성과를 얻지 못한 채로 전사했다.

이 후 등극한 트레보니아누스는 결국 야만족과 강화를 했다. 하지만 야만족은 여러 부족으로 나뉘어 있었고 이 때 강화한 것은 고트족이었다. 즉, 알레마니족도 고트족처럼 로마에게 반기를 들었고 이는 다시 고트족이 로마를 침략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제 야만족은 그냥 당하는 야만족이 아니었던 것이다.

야만족은 기병이 중심이고 로마는 보병이 중심이다. 여기에 야만족의 성숙함이 더해져 이제 전면전이 아닌 기병의 빠른 발을 이용하여 전혀 예상치 못하는 곳을 치고 로마 제국 영토 내부로 쳐들어 갔다. 이 때 처음으로 게르만족이 지중해까지 쳐들어 갔으며 이런 상태에 다른 군단에서 아이밀리아누스, 발레리아누스를 각각 황제로 추대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즉, 로마에 3명이 황제가 나온 상태인 것이다. 5개월 간의 내전을 통해 최종적으로 발레리아누스가 이겼고 단독 황제가 되었다. 3세기는 로마가 힘을 엄한데 낭비한 것이 특징인데, 이것도 그런 사례였다.

드디어 로마가 게르만 족에 의해 위기를 가지게 되는 시기까지 왔다.
책에서 지정학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많은 부분 공감이 갔다.
로마가 왜 직접 침략해서 정복하지 않고 게르만 족과 강화를 맺고 파르티아와 강화를 맺었는지.
이미 이전 글에도 썼겠지만 내가 직접 막는 것이 아닌 하나의 방어막을 세우는 것이다.
그 방어막이 다른 부족의 침입을 막아주는 형태를 유지하기 위한 전략적 방법.
다시 한 번 놀랄 수 밖에 없다.
내가 직접하기 힘든 것을 다른 사람을 이용해서 처리하는 이 단순한 방식.
그러면서 위험할 때 적절히 도와주는 이런 전략은 참 경이롭다.
별거 아닌데 깨달으면 소름돋는 것 중에 하나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