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는 ‘왕정 - 공화정 - 초기, 중기 제정(원수정) - 후기 제정(절대군주정) - 말기’로 진행된다. 지금부터는 후기 제정 시대이며 왜 절대군주정으로 이행했고 원수정이랑 어떻게 다르며 그 결과가 어떤지에 대해 살펴본다.

로마인 이야기 13편 -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서기 284년 ~ 305년)

디오클레티아누스가 황제가 된 후 그가 가장 시급하게 해결해야 했던 문제는 야만족 침입이었다. 라인 강, 도나우 강에서 침입하는 야만족을 막아야 했고 이러한 지속적 침입은 로마 내부의 치안도 약화시켰다. 그 결과 도적떼가 들끓었다.

그는 먼저 양두정치를 선언한다. 즉, 그의 친구 막시미아누스를 카이사르에 임명한 것이다. 원래 카이사르는 황태자라는 뜻이 있었지만 이 때부터는 부제라는 뜻으로 쓰였다. 즉, 아우쿠스투스는 정제, 카이사르는 부제가 되었다.

막시미아누스는 갈리아와 브리타니아, 히스파니아, 북아프리아를 지배했고 자신은 동방을 지배했다. 이런 지배가 지속되면 로마가 분할될 것을 염려하여 자신을 요비우스라는 칭호를 덧붙였다. 요비우스는 최고신 유피테르를 의미했고 막시미아누스에게는 헤르쿨레스라는 칭호를 주었다. 즉, 막시미아누스는 자기보다 아래에 있다는 것을 암시하도록 했다.

이 양두정치는 꽤나 효과가 있었다. 7년이라는 긴 시간이 걸렸지만 외부적으로도 내부적으로도 치안의 안정을 꽤 성공시켰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여기서 더 나아간 체제를 구상했다.

로마를 사분해서 통치하는 사두정치였다. 두 명의 황제가 각각 자신의 카이사르를 임명하는 것이다. 동방의 카이사르는 갈레리우스였고 서방의 카이사르는 콘스탄티우스였다. 즉, 세니오르 아우구스투스 - 유니오르 아우구스투스, 각각의 아우구스투스 밑에 카이사르가 있는 형식이다.

사두정치는 매우 큰 효과를 발휘했고 잠깐의 평화를 가져다 주었다. 하지만 이 평화를 가진 채 가만히 두면 넘치게 된다. 일단 각 황제마다 통솔할 군단이 필요했고 전처럼 적은 숫자로 야만족을 이길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기존의 30만명의 병사들을 제외하고도 30만명의 병사들이 더 필요했다. 이 병사들의 증가는 국가 재정에 큰 부담을 주게된다. 또한 주부대가 기병으로 바뀌고 각 군단병은 로마인보다는 야만족 병사들이 더 많이 섞이게 된다. 즉, 싸움에서 질 것 같으면 그들은 쉽게 배신을 했다.

그는 제국 개조도 수행했다. 즉, 지금까지의 황제는 단순히 시민 가운데 1인자라는 의미를 가졌지만 이제는 정말 황제가 되었고 이제 시민들이 쉽게 접근할 수 없었고 제일인자를 지배자로 시민을 신하로 개념을 바꾸는 시도를 했다. 또한 왕관도 쓰고 옷도 매우 고급스럽게 입기 시작했다.

이런 사두정치와 제국 개조는 4개의 황제가 각 지역을 다스리기 위한 관료 체계가 각각 필요했다. 즉, 수도도 4개 관료도 4배로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각 수도에 각각의 관료들… 국가 재정은 위기였고 세금 압박은 기하급수적으로 커졌다. 이런 세금을 거둬들일 제대로 된 방법이 없었고 결국 이전의 로마 세제는 붕괴된다.

이 분할 정치가 나중에 로마의 동서분할의 요인이 되지 않았을까?
당시 로마 사정 상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방식은 매우 흥미롭다.
그는 깨달은 것 같다. 같은 로마인으로 생각되면 언제 어디서 살해당할지 모른다는 것을...
사람은 잘 해주면 고마워하는 사람과 고마워할 줄 모르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
이전의 황제는 로마 시민의 느낌을 주어 친근하게 다가갔고...
그 결과 만만하게(?) 보였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쉽게 불만을 표출하고 그 불만이 쌓여 터지면 칼을 겨눴으니 말이다.
동양의 왕조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다. 일개 병사가 황제에게 칼을 겨눈다?
역시 인간사회에서는 어떤 관계든 적절한 거리와 선이 필요한 것 같다.

황제가 1년간 거둬들일 액수를 정하고 납세자의 수익과 관계없이 부과되도록 했다. 이와 함께 로마 화폐의 가치는 점점 떨어졌고 인플레이션은 전혀 진정되지 않았다. 결국 황제가 직접 경제를 통제하기 시작했다. 이 때 가장 큰 특징은 거의 모든 직업이 세습제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즉, 농촌을 떠나 도시로 이동하여 농촌경제가 망하는 현상 등을 막기 위한 방법이었던 것이다. 현재의 이촌향도와 같은 느낌이다. 군인 역시 세습이였다.

세제의 변화만 봐도... 인재 부족.
인재가 있어도 활약하지 못하는 로마 체제.
고이다 못해 썩었다.
뭐... 야만족이 강해진 탓도 있겠지만 황제라면 그 정도는 대비했어야 했다고 생각한다.
황제이기에 어떤 변명도 허용되지 않는다. 그게 황제아닐까?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가장 강하게 기독교 탑압을 한 황제이다. 절대군주정의 정통성을 위해서는 자신이 절대적인 권력을 물려받았다는 배경이 필요했고 유피테르로는 부족했다. 하지만 유대교, 기독교와 같은 유일신을 믿는 일신교들이 가장 큰 걸림돌이었고 이들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기독교회와 교인은 아래와 같이 탄압당했다.

  1. 기독교회 전부를 파괴한다.
  2. 모임을 금지한다.
  3. 관련된 문서, 기구를 전부 소각한다.
  4. 로마인의 모든 특전 박탈한다.
  5. 로마법의 보호를 받을 수 없다.
  6. 교회 재산을 몰수한다.
  7. 공직에서 추방한다.

이후 두번째 칙령은 성직자 계급을 투옥시켰고, 세번째 칙령으로 이 성직자들에게 로마신에게 하는 의식을 치루게 했으며 마지막 칙령은 기독교로 고발받은 자는 이유불문 사형 또는 강제노역에 처한다였다.

위의 탄압으로 엄청난 사람이 죽었을 것 같지만 죽은 사람 자체가 많지는 않았다고 한다.

사실 정통성? 배경? 잘 모르겠다.
정말 그게 저렇게 탄압하면서 까지 중요한 것인지... 필요한 것인지...
사실 배경, 정통성이 중요하다는 것은 나도 알고 있다.
지금이야 실력이 중요한 시대라 그럴 수도 있겠지만 너무 과하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최고신에게 절대권력을 물려받았기 때문에 너희를 다스린다.
이 논리를 그 당시에는 믿었다는 것도 신기하다. 작가의 생각만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이렇게 대탄압을 받고도 기독교는 지금까지 살아있다.
그 근원에는 무엇이 있을까? 갑자기 궁금해진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가장 큰 목욕탕을 만들었다. 이 이후 공공사업으로 목욕탕이 더이상 지어지지 않는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죽어서 은퇴한 것이 아닌 자기 스스로 정제에서 물러나고 기존의 부제가 정제가 되었으며 부제의 새로운 후임자로 세베루스와 막시미누스 다이아를 각각 선언하여 사두정치를 지속적으로 유지했다. 이 때 막시미아누스도 함께 은퇴한다.

떠나야 할 때를 알고 떠나는 사람의 뒷모습은 아름답다.라는 구절이 생각난다.
적절한 시기에 잘 떠났고 그 이후 전혀 정치에 개입이 없었다고 하니 대단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