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라노 칙령으로 인해 기독교가 이제 다른 종교와 같은 처지에 놓이게 되었고,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 내의 삼위일체파에 힘을 주면서 기독교의 시대로 변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그 기독교가 로마를 장악하는 시기가 된다.

로마인 이야기 14편 - 콘스탄티우스 황제(서기 337년 ~ 361년)

콘스탄티누스는 죽기 전에 로마를 5개의 영역으로 나누어 세 아들과 두 조카에게 각각 통치를 맡겼다.

맏아들 콘스탄티누스 2세 - 갈리아, 히스파니아, 브리타니아 둘째아들 콘스탄티우스 - 소아시아, 시리아, 이집트 셋째아들 콘스탄스 - 이탈리아, 판노니아, 북아프리카 맏조카 달마티우스 - 다키아, 트라키아, 마케도니아, 그리스 둘째조카 한니발리아누스 - 북부 메소포타미아, 아르메니아 왕국

콘스탄티누스의 장례식에는 콘스탄티우스, 달마티우스, 한니발리아누스 등이 왔다. 다른 두 아들은 거리가 멀어서 오지 못했다. 장례식이 끝나고 달마티우스, 한니발리아누스 등의 육친들이 모조리 살해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유일하게 콘스탄티우스와 12살의 갈루스와 6세인 율리아누스만 살아있었다. 이 사건의 내막에는 콘스탄티우스가 개입했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개입하지 않았고 이 사건에 아무런 조사도 없이 덮어버렸다.

그 후 남은 세 형제는 조카들이 맡은 두 영역을 나누어 가졌다. 이 때 이 두 영역은 콘스탄티우스와 콘스탄스가 지배하는 영역과 근접하여 이 두 형제가 나눠 가지게 된다.

여기에 불만을 가진 콘스탄티누스 2세는 동생 콘스탄스가 다키아에 갔을 때를 노려 공격했지만 패전하여 죽었다. 동생이 손을 쓰기도 전에 스스로 자멸한 것이다. 자연스럽게 콘스탄티누스 2세가 다스리던 지역은 콘스탄스에게로 합병되었다.

욕심이 과하면 화를 부르는 법.
나와 형과의 관계를 생각해 보게 된다.
형은 나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이다. 무심한 듯 신경쓰는 것이 다 느껴질 정도니까.
티나게 신경써주지는 않지만 나를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 진심으로 느껴진다.
그래서 나도 그에 맞는 행동을 하려고 노력한다.
이 관계를 평생 유지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이 때 콘스탄티우스는 페르시아를 상대한다고 정신이 없었기에 불만을 가지거나 영토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이렇게 로마의 2/3는 콘스탄스가 1/3은 콘스탄티우스가 지배하는 구도로 10년이 흘렀다.

콘스탄스는 30세, 콘스탄티우스는 32살이 되었다. 콘스탄스는 전쟁에 뛰어난 재능을 발휘했다. 하지만 내정에는 그 재능이 없었고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결국 모든 내정은 환관들의 손에 맡겨졌다. 그 결과 전쟁에서 공을 세운 장수들에게 제대로 된 공로가 인정되지 않았고 여기에 불만을 느낀 마그넨티우스라는 장수는 콘스탄스를 죽이는 계획을 세웠고 마르켈리누스라는 고위 행정관을 황제로 옹립하기로 했다. 이렇게 콘스탄스는 죽게 된다.

콘스탄티우스는 더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었고 페르시아와 바로 휴전 협정을 맺는다. 그리고는 콘스탄티누스의 후광을 업고는 서방으로 진출했다. 그는 정말 신중한 스타일이라서 자신이 서방을 공격하는 동안 페르시아가 협정을 깨고 쳐들어 올 것을 염려했다. 그는 결국 살아남은 육친 중 한 사람인 갈루스에게 카이사르라는 호칭을 주고 동방을 다스리게 한다.

마르켈리누스는 콘스탄티누스가 오는 소식을 듣고 바로 도망쳤고 마그넨티우스가 황제가 되었다. 수적으로 압도적인 콘스탄티우스는 당연히 마그넨티우스와의 싸움에서 이겼다. 이 싸움의 승리는 서방 지역들을 콘스탄티우스 편으로 만드는데 성공했고 마그넨티우스는 리옹에서 자결하게 된다. 이렇게 콘스탄티누스는 손쉽게 토벌에 성공했고 배신자들을 모조리 숙청하였다.

부제가 된 갈루스는 동생 율리아누스와 함께 강제적으로 고립된 생활을 하게 되었다. 아버지를 포함하여 모든 육친이 죽었지만 이 둘은 살아남았다. 살아남은 것 보다는 죽일 필요조차 못느꼈던 것 같다. 이렇게 그 둘은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노예들과 감시자들 사이에서 고립된 채 오랜기간 생활하게 되었다.

형 갈루스는 그 고립생활로 피폐해졌고 성격이 파탄났다. 하지만 동생 율리아누스는 그리스 문학, 철학에 큰 관심을 가졌고 책을 읽고 상상하면서 고립생활을 견뎌내었다. 이런 상태에서 부제가 된 갈루스… 3년 동안 동방을 다스리지만 많은 문제를 일으키고 신하들과의 거리가 멀어지면서 처형당하게 된다. 그 후 율리아누스는 부제가 되고 라인 강으로 보내진다. 그 때 율리아누스는 24살이었다.

콘스탄티우스는 확신을 가지고 걸음을 옮겼다라고 들을 만큼 제대로 기독교 우대정책을 폈다.

  1. 밤 중에 산 제물 바치는 것 금지
  2. 공식제의에 산 제물 바치는 것 금지
  3. 우상 숭배 금지(제우스, 포세이돈, 아테네 등을 믿을 수 없다.)
  4. 신전 폐쇄

이렇게 우대정책을 펴는 동안 기독교는 내부 분열이 일어났다. 삼위일체파와 아리우스파를 비롯한 각 종파의 논쟁이 심화되었다.

삼위일체 - 성부, 성자, 성령의 세 위격이 하나의 실체인 하나님 안에 존재한다는 교의. 아리우스파 - 아리우스는 예수의 본질을 신과 인간의 중간적 존재라고 주장.

콘스탄티누스가 니케아 공의회에서 삼위일체파의 손을 들어주었지만 죽은 후 다시 도돌이표를 찍었다.

왜 로마는 로마다움을 잃었을까?
시간이 흐르면서 로마다움이 제대로 계승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황제라는 자리의 잦은 교체. 외부 정세의 변화. 원로원, 로마시민, 속주민의 만족.
이런 다양한 것들을 전부 충족하려면 황제 개개인의 능력과 뛰어난 인재가 필요하다.
하지만 항상 뛰어난 황제와 인재가 나오는 것은 아니기에...
전부를 볼 수 없었고, 보이지 않는 것, 보고 싶지 않은 것을 못 본 것이 아닐까?
지금은 살육, 전쟁 등이 없기에 그나마 계속 유지와 발전을 거듭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율리아누스는 라인 강에서 지내는 동안에도 감시자로 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하지만 라인 강 근처는 야만족의 침입이 잦았고 항상 전투에 출전했고 이렇게 감시자의 눈을 피할 수 있었다. 전투에 참여하는 것은 단순히 감시자의 눈을 피한 것이 아닌 자신의 입지를 넓히고 확고히 하는 방법이 되었다. 당시 그는 전투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였지만 실제 총사령관으로 앞장서 전쟁에 참여했다. 전투를 할 때마다 새로운 것을 배워나갔고 익혀나갔다. 그렇게 꾸준히 배우면서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고 1만여 명의 군사로 3만 5천여 명의 야만족들과의 전투에도 크게 승리했다. 이제 병사들은 율리아누스를 전적으로 신뢰하게 되었고 그는 콘스탄티우스 정제에게도 점점 인정받게 되었다.

이렇게 잦은 전투의 승리와 적극적으로 공격적인 태세를 취한 율리아누스 덕태에 이제 게르마니아 방벽 밖으로 야만족을 완전히 물리칠 수 있었다. 이렇게 갈리아 지역은 다시 살아날 수 있는 계기를 맞이했다.

율리아누스는 세제 개혁도 단호하게 시행하여 부흥을 이끌었다. 그가 실시한 세제는 근검절약, 공정한 세금징수, 기존 세금 삭감이다. 이와 동시에 침입으로 황폐해진 농경지 정비도 들어갔다. 차근차근 갈리아는 안정을 되찾기 시작했다.

이렇게 부제의 위상은 높아지고 콘스탄티우스는 위기의식을 느껴 율리아누스를 공격하러 가지만 갑자기 병사하게 된다.

율리아누스. 내가 최근에 로마인 이야기를 읽으면서 마음이 간 인물이다.
사실 오현제 이후 마음에 드는 황제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 나온 율리아누스는 달랐다.
지식, 지혜도 풍부하며 학습능력이 뛰어났고 용기도 있다.
자신의 생각을 생각만으로 남긴 것이 아닌 실제 행동으로 보여줬다.
정말 멋있는 황제가 오랜만에 나왔다.
나도 책을 많이 읽고 끊임없이 공부할 것이고... 용기를 잃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꼼꼼함을 기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