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인 다운 마지막 로마인 스틸리코가 죽었다. 이렇게 로마는 망해간다.

로마인 이야기 15편 - 로마 제국의 멸망(서기 410년 ~ 476년)

끊임없이 약탈당한 서로마 제국은 더이상 패권국가가 아니었다. 패권국가라면 로마인을 포함한 속주민들 모두 보호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이때 이미 로마는 붕괴된 것과 같았다.

411년부터 417년까지는 서로마도 안정기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그 이유는 갈리아 지역의 야만족들이 서로 싸웠기 때문이다. 이런 싸움에서 서고트족이 먼저 서로마에 붙었으며 약해진 서로마 제국은 서고트 족을 로마 방위로 사용하기로 하고 이들에게 자신들의 영토를 일부 떼어준다. 즉, 로마가 가진 일부 지역을 주면서 그들에게 방위까지 맡기려는 목적이었다.

그 후 423년 호노리우스가 죽고 425년에 고작 6살인 발렌티아누스 3세가 황제가 되었다. 너무 어린 탓에 어머니의 후견이 필요했고 이렇게 서로마제국은 여자인 플라키디아가 지배하게 된다. 동로마는 이보다 먼저 여자의 지배에 들어와 있었다. 실제 동로마 제국을 지배한 사람은 황제의 누나인 풀케리아와 테오도시우스 2세의 아내였다.

서로마에는 두 명의 장군이 있었다. 보니파키우스와 아이티우스가 바로 그들이다. 이전부터 전쟁터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보니파키우스는 플라키디아와 친했지만 아이티우스는 전혀 아니었다. 아이티우스는 오랜 기간 야만족의 볼모로 잡혀있었다. 볼모에서 해방된 이후에도 그 때 만났던 야만족들과 연락을 계속 취했지만 로마군으로서 야만족과 싸우기도 해야했다. 그렇게 그는 한 부대의 지휘까지 맡게 된다.

아이티우스는 여자의 지배가 싫었기에 자신이 볼모로 잡았던 훈족과 연락하여 기병을 빌렸으며 이를 이용해 사령관 지위를 획득했다. 이렇게 보니파키우스와 아이티우스는 같은 시대에 같은 지위를 가졌다. 이 둘은 양립할 수 없었다.

당시 북아프리카 쪽을 담당하던 보니파키우스는 도나투스파와 가톨릭파를 잘 중재하여 다스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평온하게 다스리는 그를 플라키디아는 분리독립을 한다는 식으로 의심을 하게된다. 그래서 그녀는 보니파키우스에게 소환장을 보냈다. 하지만 보니파키우스는 쉽게 넘어가지 않고 소환장을 의심했다. 그러자 플라키디아는 토벌군을 편성해 보내게 된다. 하지만 나름 훌륭한 사령관이었던 그는 쉽게 토벌군을 해치우고 더 나아가 반달족에게 병사를 빌리게 하여 이 싸움에 끌어들이게 된다. 반달족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였다.

다른 야만족 병사 및 도나투스파가 반달족에게 가세하게 되는 상황이 발생해 버렸다. 이렇게 반달족이 북아프리카 일대를 집어삼키게 된다. 당시 북아프리카에는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있었고 끝없이 설득했지만 그의 설득은 전혀 먹히지 않았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교회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인물이다. 그는 32세까지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암브로시우스 주교의 설교에 의해 단번에 돌변하게 된다. 그렇게 33살에 세례를 받았다. 9년간 수도원 새왈을 하고 43살에 주교가 되고 76세에 죽었다. 그는 끝없이 도나투스파에게 설교했고 도나투스파를 가톨릭화 하는데 힘을 쏟았다. 그 결과 도나투스파는 점점 소수파가 되어갔다. 가톨릭파 역시 도나투스파를 많이 죽이고 교회를 불태운 것도 한 몫했다. 이런 가톨릭파는 반달족에 가세한 도나투스파에게 성 아우구스티누스 시신을 빼앗길까 두려워 몰래 시신을 피난시켰다고 한다.

보니파키우스는 이렇게 북아프리카를 버리고 돌아왔지만 다행히 죄를 용서받고 다시 군사령관이 되었다. 그와 아이티우스는 서기 432년 리미니 근처에서 격돌했다. 아이티우스는 대장끼리 싸우자는 제안을 했고 결국 아이티우스가 이겼다. 이렇게 이 둘의 싸움으로 서로마 제국은 그나마 가지고 있던 힘마저 거의 잃게 된다.

반달족이 북아프리카를 점령한 후 이제 지중해는 안전한 구역이 아니게 된다. 시칠리아 섬과 같은 곳은 지속적으로 반달족에게 해적질 당하게 된다. 이렇게 지속적인 괴롭힘에 서로마 제국은 반달족에게 강화를 청하게 되고 이렇게 반달족은 북아프리카를 다스리게 된다.

모든 야만족들의 야만족인 훈족에 의해 로마 침공이 시작된 것이다. 이 훈족을 이끌던 불레다가 죽고 아틸라가 그 뒤를 물려받으면서 훈족의 움직임이 더욱 거세졌다. 기독교에서는 훈족의 진격을 신의 채찍이라고 한다. 동로마 제국은 이를 막지 못하고 결국 훈족이 원하는 요구 사항을 전부 들어주게 된다. 이런 훈족의 침입이 지속된지 5년이 흐르고 6년째에 동로마 제국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가 사망한다. 그 뒤를 이은 사람은 마르키아누스였다.

마르키아누스는 군인 출신으로 매사 적극적이었다. 직접 자신이 군대를 지휘하며 전쟁터에 나가는 알맹이도 사령관이었다. 이런 낌새를 눈치챈 아틸라는 서로마 제국의 호노리아에게 눈을 돌렸다. 호노리아는 30살까지 결혼을 하지 못했고 수녀원에 들어갈 마음도 없었다. 그래서 자신의 측근 환관을 통해 아틸라에게 자신과 결혼하면 서로마 제국의 절반을 얻을 수 있을 거라는 편지를 보내게 된다.

이렇게 아틸라는 서로마로 눈을 돌리게 되고 서로마 사령관 아이티우스는 자신과 친한 훈족과 싸워야 했다. 아이티우스는 이 큰 싸움에서 아틸라를 이기는데 이 싸움이 바로 샹파뉴 회전이다. 패한 아틸라는 돌아가면서 북이탈리아를 약탈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약탈하는 것을 아이티우스는 알았지만 움직일 수 없었다. 갈리아 야만족들을 가만히 둘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454년 아틸라가 죽고 훈족은 안개처럼 사라지게 된다. 이렇게 안정을 찾은 후 발렌티아누스 3세와 아이티우스 모두 로마에 왔다. 발렌티아누스 3세는 주변의 이간질에 의해 갈리아에서 오지 않은 아이티우스가 잘못을 빌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아이티우스는 잘못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며 당당했다. 이렇게 둘 사이는 금이가고 결국 아이티우스는 살해당한다. 이것은 455년 반달족의 로마 겁탈을 초래하게 된다.

발레티아누스 3세는 아들을 남기지 않고 죽어서 원로원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가 황제에 오르게 된다. 455년 겐세리크가 이끄는 반달족이 로마에 나타났다. 막시무스는 아무것도 못한채 동요한 민중에게 살해당했다. 이렇게 두 달 동안 황제 자리는 비어있고 겐세리크에게 강화를 요청하게 된다. 이 때 로마는 사람빼고 대부분이 약탈 당했다.

이 겁탈 이후 아비투스가 황제로 옹립되었다. 하지만 갈리아에서 옹립된 황제라 이탈리아에 가자마자 살해당했다. 그 다음으로 뽑은 황제는 마요리아누스라는 야만족 출신의 군인이었다. 그는 좋은 정책을 펴고 의욕적으로 황제의 역할을 했지만 시대가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을 만큼 최악이었다. 하지만 이런 정책은 원로원이나 관료들에게 크게 반감을 샀으며 북아프리카 원정 계획으로 무리하게 배 300척을 만들기 시작했다.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이 배가 완성되기 직전에 전부 불타버렸다. 이렇게 그는 망연자실하다가 살해당한다.

이렇게 리비우스 세베루스, 마요리아누스, 세베루스가 순서대로 황제가 된다. 이 세 황제는 리키메르라는 남자의 꼭두각시였다. 즉, 리키메르는 킹메이커였으며 아이티우스 휘하의 로마군으로 두각을 나타낸 뒤 황궁으로 들어가 권력을 잡은 인물이다.

이 리키메르는 동로마 제국에게 서로마 제국의 황제 자리에 앉힐 사람을 보내달라고 했다. 사복을 채우는 솜씨도 대단하지만 시대의 흐름을 나름 제대로 본 인물 중에 하나였다.

동로마 제국의 황제는 마르키아누스가 자연사 후 레오로 바뀌어 있엇다. 레오는 안테미우스를 서로마 황제로 앉히고 그에게 병력을 주었다. 이제 동과 서는 하나가 된 것처럼 북아프리카를 지배하는 반달족을 치러 갔다. 총사령관은 바실리스쿠스다. 그는 전쟁 경험이 없는 단순히 황제의 손아래 처남이었다. 하지만 반달족의 겐세리크는 나이가 많지만 노련미가 뛰어난 사람이었다. 바실리스쿠스는 그에게 견줄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결국 총사령관 바실리스쿠스는 패배했고 서로마 제국의 원군인 마르켈리누스 장군의 부대도 달아나게 된다. 즉, 동, 서 로마 제국의 합동 공격은 실패로 끝이 나게 된다.

리키메르는 이후 안테미우스와 사이가 나빠지고 둘 사이의 무력 충돌이 일어나게 된다. 안테미우스, 리키메르, 안테미우스 후기 황제로 지목된 올리브리우스까지 전사하게 된다. 그후 글리케리우스라는 인물이 황제가 되지만 동로마 제국이 율리우스 네포스라는 장군을 황제로 앉히겠다고 알려왔다. 하지만 네포스는 이미 서로마 제국은 버리는 카드라는 것을 알아서 이탈리아로 가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자 오레스테스라는 사람이 동로마 제국의 반대파를 이끌며 자신의 아들인 로물루스 아우구스투스를 황제로 옹립한다. 여기에 반대하는 목소리는 북이탈리아에서 나오게 되었고 야만족 출신 장군 오도아케르가 두목으로 이끄는 싸움에 오레스테스는 전부 지고 붙잡혀 살해당했다. 이후 라벤나에 입성한 오도아케르는 로물루스를 퇴위시켰다.

이렇게 476년 로마 제국은 멸망했다. 이후 서로마 제국에는 황제가 없다. 너무 허무하게 멸망해서 아마 그 당시 로마 사람들에게 로마가 명망했다고 하면 웃을 것이다. 로마 제국이 아직도 존재하고 있었냐고 반문하면서.

약 1200년 이상 지속된 나라가 정말 허무하게 사라졌다.
사실 허무하다는 생각과 함께 잘 됐다고도 생각한다.
진짜 읽으면서 짜증이 났다. 황제는 계속 바뀌고 질서도 없고 막장이다.
그 막장 속에서 황제와 고위층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내가 죽기전에만 안 망하면 된다.일까?
진짜 나라가 망할 위기라는 것을 몰랐을까?
분명 알았다면 어떻게든 합의를 봐야 정상아닌가?
그냥 답답하다. 무엇이 그들의 눈과 귀를 막았을까?
무엇이 그들의 사고를 멈추게 했을까?
끊임없는 전쟁으로 재정은 파탄났고 시민들은 희망을 잃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또 이해가 된다.
도저히 일어설 수 없는 상황인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일어서 보려고 할 때도 번번히 운도 안 좋았고 방해도 많았다.
특히 고위층에서 방해를 많이 했다. 이 부분을 보면 그냥 눈 앞의 이익에 눈이 먼 것 같다.
로마는 외부의 방해도 있었지만 나는 스스로 무너졌다고 생각한다.
로마다움을 잃고 어딘가에 의지해야만 하며 자기에게 들어올 이익만 생각하게 되는 후기 사람들.
하지만 변화와 위기는 역으로 기회라고 했다.
새로운 왕국와 질서가 도래하게 되는 기회이기도 한 한 국가의 멸망.
덧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