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마 제국이 망했다. 이후 로마가 지배했던 영토는 어떻게 되었을까?

로마인 이야기 15편 - 제국 이후(서기 476년 ~ )

오도아케르는 동로마 제국 황제인 레오에게 자신을 파트리키우스로 칭해달라고 요청했다. 즉, 황제 대리로 인정해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이탈리아는 로마의 출발지이기에 정통성이 중요했다. 그래서 그는 동로마 제국의 눈치를 계속 보았다. 하지만 동로마는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고 애매한 관계가 지속되었다.

브리타니아의 하드리아누스 방벽 이남은 색슨족과 앵글족에게 점령당했다. 그래서 북부는 스코트족, 남부는 색슨족과 앵글족이 통치하게 된다. 그래서 기존에 살고 있던 켈트계 브리타니아 인들은 갈리아 북서부로 이주하여 정착하게 된다. 이후 브리타니아는 앵글로의 나라인 잉글랜드가 된다.

갈리아는 프랑크족이 다스리게 되었고 이는 프랑크족의 나라를 뜻하는 프랑스가 된다. 당시 갈리아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기독교였고 프랑크족은 이도교였다. 하지만 승자보다 패자의 수가 훨씬 많았기에 프랑크족 사람들도 이후 기독교로 변했다.

히스파니아는 북서부는 수에비족이, 나머지는 서고트족이 통치했다. 프랑스 부근 처럼 평지가 없는 지역이기에 지배자체가 쉽지는 않았지만 승자보다 패자의 수가 많았기에 서로 잘 융화하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북아프리카는 반달족이 통치했고 전에도 말했듯이 승자와 패자의 공생따위는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오도아케르도 역시 공생관계를 잘 이끌어 냈다. 그는 이 공생관계를 자신들은 손님, 기존 로마인들은 주인이라고 규정했고 주인이 찾아온 손님을 후대하고 환대하며 재워준다는 형태로 표현했다.

그는 스틸리코가 사용한 3분의 1 정책을 사용한다. 중, 상류층이 가진 재산의 3분의 1을 자신들의 병사들에게 주어 살게 하는 것이었다. 신기하게 이 정책에 반대하는 사례는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오도아케르는 기존 체제를 계속 유지했다. 원로원도 그대로 유지되었으며 동화 조폐권까지 주었다. 이처럼 그는 승자와 패자의 역할분담을 제대로 나누었다. 하지만 완전한 융합이 아닌 공생을 위한 협력이었다. 그 본질적인 원인은 종교에 있었다. 승자는 아리우스파, 패자는 삼위일체를 믿는 가톨릭파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평화가 17년간 지속되었으나 테오도리크라는 동고트족을 이끌며 레오 황제에게 파트리키우스라는 칭호까진 인물에 의해 이 평화도 깨지게 된다.

테오도리크는 33살에 높은 지위에 올랐지만 욕심은 멈추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독립된 국가를 원했고 이탈리아로 진격하게 된다. 이 때, 레오 황제 역시 좋다고 동의하게 된다.

테오도리크와 오도아케르의 싸움은 493년까지 지속되었고 그 둘은 강화를 맺으며 이탈리아를 공동으로 통치하기로 한다. 하지만 10일 후 오도아케르가 살해당하게 되고 테오도리크는 이탈리아를 단독으로 통치하게 되었다.

테오도리크 역시 레오 이후에 황제가 된 아나스타시우스 황제에게 공식 지위를 요청했지만 동로마 제국은 애매한 태도로 일관했다. 이렇게 테오도리크 역시 오도아케르처럼 멋대로 이탈리아 왕이라고 자칭했다.

로마인으로 보이고 싶은 고트족은 있지만 고트족으로 보이고 싶은 로마인은 없다.라고 테오도리크가 말했다. 이 말이 내포하는 의미는 로마인들에 비해 문(文)에 약했던 고트족은 로마인들에게 교육을 받아야 했고 이는 게르만이 로마화 될 가능성이 컸다는 것과 로마인들은 속으로 고트족을 경멸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동코트족은 교육을 받지 않는 정책을 폈다. 그 결과는 자신의 이름도 못쓰는 지배자가 늘어났다. 결국 로마인들이 더 필요한 상황이 된 것이다. 이렇게 유명한 로마인이 바로 카시오도루스다. 그는 테오도리크가 말한 말을 새롭게 태어나게 만드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어쨋든 그는 33년간 이탈리아에 평화를 가져다 주고 죽었다. 승자와 패자 모두 그의 죽음을 슬퍼했다고 한다.

리더가 된다는 것은 집단의 균형을 잘 조절하는 역할인 것 같다.
아무리 승자라도 패자를 함부로 대하지 않은 것.
그들의 체제를 한번에 무너뜨리지 않은 것.
이런 것들이 오도아케르는 17년, 테오도리크는 33년 동안 평화를 유지한 바탕이 아닐까?
이 방식에서도 카이사르라는 인물이 얼마나 대단한지 또 한번 느끼게 해주는 것 같다.
로마 시대처럼 심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지금도 인종차별이 남아있다.
그렇다고 열등감을 느끼는 것은 좋지 않다.
33년간 고트족이 로마인들에게 교육을 받았다면 이후 세계는 변했을지도...

테오도리크의 뒤를 이은 손자 아탈라리크는 8년 후에 죽었고 그의 어머니인 아말라순타는 테오다투스와 재혼하게 된다. 하지만 아말라순타의 불안감은 사라지지 않아 동로마 제국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에게 접근하게 되고 이를 알게된 테오다투스는 그녀를 죽였다. 이것은 유스티니아누스에게 빌미를 제공할 가능성이 있었다. 이렇게 혼란한 상황에서 테오다투스 역시 퇴위당했고 아말라순타의 사위인 위티기스가 뒤를 이었다.

이 시기에 카시오도루스는 은퇴했고 학원(비바리움, 양어장)을 설립했다. 같은 시대에 베네딕투스라는 인물은 수도원을 설립했다. 이 두개 중에 수도원은 남았지만 카시오도루스의 학원은 사라졌다. 시대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둘의 차이는 먼저 노동에 있다. 양어장에서는 노동을 하지 않지만 수도원에서는 노동을 한다. 두번째는 기도였다. 양어장에서 독서는 책을 읽는 것이지만 수도원은 정말 소리내어 읽는 독서. 기도였다. 마지막으로 수도원은 절대복종이었으며 양어장은 자유였다. 베네딕투스의 수도원은 이후 중세 유럽의 수도원 모델이 되었다.

다시 돌아와서 이 시기의 황제는 유스티니아누스. 유스티니아누스 대제라고 불린다. 이 유스티니아누스의 업적은 하기아 소피아 성당 건립, 로마법 대전 편찬, 옛 로마 제국 영토 수복이었다.

유스티니아누스가 대제가 된 가장 큰 이유는 로마법 대전 편찬에 있다. 이 대전에는 기독교 국가에서 필요한 법률을 모은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기독교도 입장에서는 대제라고 부를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내가 봤을 때는 정말 무능한 황제 중 하나이다.
내가 내용 전부 쓰진 않았지만 아래 나오는 벨리사리우스 장군은 이 황제때문에 정말 피곤한 삶을 살았다.
그런 혹독한 상황에서도 전쟁에서 승리한 벨리사리우스는 진짜 뛰어난 장군이라고 생각한다.
종교가 정치에 들어오면서 황제는 신이 선택한 사람이라는 개념이 생겼다.
이 개념때문에 아무리 무능한 황제라도 죽을 때까지 황제의 명에 따라야 했다.
이런 점만 보더라도 종교는 정치와 반드시 분리되어야 한다.

유스티니아누스가 통치할 당시 주교는 그에게 지속적으로 성전사상을 강요했다. 그래서 그는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강화로 마무리하고 북아프리카로 진격한다. 이 때, 벨리사리우스라는 장군이 등장한다.

벨리사리우스는 533년 반달 왕국을 공격했다. 단 두번의 전투로 반달 왕궁은 멸망했고 534년 개선한 후 535년 바로 이탈리아로 출격했다. 이 때 주어진 병력은 약 8,500명이다. 이 군대로 수십만명과 싸워야 했다.

벨리사리우스는 단 5천명으로 나폴리를 탈환하는데 성공한다. 그 방법은 수도 통로를 이용해 잠입한 것이다. 탈환 후 고트족은 15만 정도의 병력을 모으기 위해서 로마를 버리고 북쪽으로 갔다. 벨리사리우스는 자연스럽게 로마를 탈환했다. 이렇게 탈환한 후 지배하는 동안 3만 명의 자위대원을 얻을 수 있었다.

1년간 로마 공방전이 지속되었고 양쪽 다 지쳤다. 잠깐 동안 이 둘은 강화를 맺었고 벨리사리우스는 황제에게 도움을 요구했다. 이에 유스티니아누스는 원군과 돈, 식량을 포함하여 나르세스라는 장군도 함께 보냈다.

지휘관이 두명이 되었고 이는 고트족에게 여유를 준 꼴이 되었다. 결국 벨리사리우스 단독 지휘관으로 하며 나르세스는 귀환하게 된다. 벨리사리우스는 시간을 낭비한 만큼 라벤나로 직접 침공하는 방향으로 방식을 바꾸었다. 반년의 전투로 위기투스의 항복을 받아냈다.

이렇게 이탈리아를 수복한 것으로 보였지만 벨리사리우스가 떠난 후 1년도 지나지 않은 서기 540년 새롭게 선출된 토틸라 휘하에 집결하게 된다. 이렇게 4년간 토틸라에게 이탈리아는 다시 우롱당했고 결국 페르시아에 있던 벨리사리우스는 이탈리아로 향했다.

7천명이라는 병력으로 로마를 지켜야 했다. 하지만 실패했고 로마에 있던 원로원들은 모조리 소멸당했다. 이렇게 로마 원로원은 최후를 맞이했다.

벨리사리우스는 그래도 이탈리아 남부와 시칠리아에서는 고트족을 몰아냈다. 하지만 고트족 전체를 몰아내지 못한 책임은 져야했기에 귀환 후 4년간 한직에 머무르게 된다. 하지만 나르세스가 다시 이탈리아로 갔고 수년간 약해진 고트족과의 전투에서 이기며 알프스 너머까지 몰아냈다.

이렇게 553년 이탈리아에서의 18년간 벌어진 전쟁이 끝났다. 전쟁은 끝났지만 이탈리아는 죽었다. 그리고 565년 벨리사리우스와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죽는다. 나르세스 장군도 3년 후 죽는다. 이렇게 동로마 제국이자 비잔틴 제국에도 인물이 없었다.

벨리사리우스가 다른 시대에 태어났다면 어땠을까?
분명 스키피오나 한니발, 카이사르와 같이 전쟁에서 두각을 나타냈을 것이고 인정받았을 것이다.
당시 황제들은 무위도식했을 것 같다. 자신의 교양을 쌓으려는 노력도 하지 않은채 말이다.
적어도 책이라도 꾸준히 읽었다면 이전의 율리아누스와 같이 멋진 황제도 나왔을 텐데...
진짜 충성을 다하는 신하를 배척하고 자신에게 아첨하는 자들의 말에 휘둘리는 황제들...
이런 황제들이 지속적으로 나온다면 망하는 것이 당연하다.
진짜 나를 위한 사람을 알아보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겠다.
로마는 정말 허무하게 망했다. 망하는 동안 너무 많은 사람이 희생당했다.
대제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모두 죽어서 좋은 곳으로 갔을까?
정말 신이라면 가톨릭화를 해서 한 나라를 힘들게 만들고 많은 사람을 희생시킨 황제를 용서할까?
또한, 황제는 신이 지정한 사람이라는데... 무엇때문에 이런 무능력한 황제들이 황제가 되도록 했을까?
시련을 주기 위해서...?
정말 신이라면 그 많은 사람들이 황제에 의해 희생되게는 하지 말아야 하는 것 아닌가...?
어쨋든 기독교화가 된 계기가 있지만 로마는 선을 넘었고 이로 인해 자멸했다고 생각한다.
훈족의 침입을 포함하여 다양한 원인이 있겠지만 나는 로마의 멸망은 종교적 차이로 인해
하나로 화합되지 못한 것이 가장 큰 이유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