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멸망 이후의 지중해 세계 - 상편을 다 읽고 하편을 구하지 못해 읽지 못하고 있다가 집근처 알라딘 중고서적에 이 책이 나왔길래 바로 사서 읽게 되었다.

이슬람 술탄의 국가 투르크는 몽골의 침입으로 인해 수도를 점점 서쪽으로 옮겼고, 유럽은 몽고의 침입에 불안을 떨어야 했다. 하지만 티무르가 죽고 난 후, 몽고는 급속도로 세력이 약해졌고 다시 투르크의 시대가 왔다.

몽고에게 철저하게 패한 뒤 재건하는 모습을 전부 경험했던 술탄 무라트는 현재 유럽정세를 계속 지켰다. 하지만 그의 뒤를 이은 메메드 2세는 투르크의 재건 후 모습만 보아온 사내였다. 그는 알렌산드로스 대왕과 같은 영광을 바랬던 인물로 유럽 전체를 자신의 땅으로 만드려는 야심이 있었고 이는 콘스탄티노플을 점령으로 이어진다. 이렇게 로마는 완벽히 망하게 된다.

콘스탄티노플을 점령 후 보스니아, 그리스 남부의 비잔티움제국을 공격했다. 전부 메메드 2세의 손에 떨어졌으며 그 후 에개 해는 투르크의 바다가 되었다. 레스보스 섬, 네그로폰테 섬을 차례대로 점령했다. 네그로폰테는 베네치아령이었는데 정말 중요한 곳이었다. 네그로폰테는 콘스탄티노플이나 흑해로 가는 상선의 중계기지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투르크는 바다와 육상으로 서구 기독교 세계로 진격했지만 바다에 대한 경험이 전무하기에 오합지졸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를 캐치한 투르크는 해적을 재차 사용하기 시작한다. 이전의 해적과 다른 점은 평상시에는 해적질을 하고 전쟁 시에만 투르크 군에 참여하면 된다는 조건이었다. 즉, 그들은 해적질을 하면서 공인된 사회적 지위를 얻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베네치아만이 해적 대책을 실시하고 있었다. 베네치아가 그만큼 제해권이 넓었다는 증거이다. 아드리아 해, 아오니아 해, 에게 해, 교역 상대 중에는 시리아, 이집트, 북아프리카, 북유럽과 영국까지 있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배네치아는 상선단에 호위용 대형 군용 갤리선을 붙였다.

교황청도 해군을 창설했지만 겨우 모은 배가 12척이었다. 베네치아는 지속적인 투르크의 침입으로 로마 교황을 설득해 기독교 국가가 하나로 되게 만들었다. 이 때 전력은 아래와 같다.

베네치아공화국 - 50척 로도스 섬에 본거지를 둔 성 요한 기사단 - 3척 프랑스 - 4척 로마교황청 - 13척

베네치아공화국의 힘이 강한 것을 알게된 해적은 아오니아 해에서 티레니아 해로 일터를 옮긴다. 이탈리아 반도 서안부터 피해를 입기 시작해서 로마 근처까지 해적의 범위가 넓어졌다.

이런 시대에 유명한 해적이 몇 있는데 그 중 한 명이 쿠르토골리이다. 그는 술탄인 셀림에게 엄청난 후원을 받고 비제르타(비제르테)에서 해적질을 시작했다. 이 때 교황은 레오 10세였는데 그는 더 이상의 해적질에 견디다 못해 신성동맹을 발족하게 된다. 이로써 제노바공화국, 프랑스, 교황청 이렇게 신성동맹이 이뤄지고 여기에는 유명한 안드레이 도리아라, 파올로 베토리라는 인물들이 있었다. 안드레이 도리아는 비제르타까지 쳐들어가서 노예가 된 동포를 해방시키고 정박되어 있던 모든 배를 불태웠다.

로마 교황이 잠깐 마렘마 평원에 나와있다는 것을 안 쿠르토골리는 반격으로 마렘마 평원을 습격한다. 다행히 교황은 말을 타고 도망쳐서 살았지만 혼자만 살고 도망치게 됐다는 것 자체는 기독교 세계 전체에 치욕을 준 것과 같았다.

쿠르토골리는 이 이후 투르크 해군 총사령관이 되었고 이 뒤를 가드 알리라는 인물이 받았다. 가드 알리는 파올로 베토리와의 전투에서 이겼고 베토리를 사로잡았다. 이 후 안드레이 도리아와의 전투에서 져서 포로가 되었고 그는 옥살이를 하다 죽게 된다.

파올로 베토리가 실종된 후 교황청은 교황청 해군 사령관을 비워둘 수 없었다. 레오 10세가 새로운 사령관을 뽑으려 하기 직전에 베토리에게 편지가 왔고 그를 어마어마한 돈을 들여 데려올 수 있었다.

돌아온 베토리는 쉬지 않고 바로 다시 사령관으로 복귀해서 투르크 군과 싸웠다.

16세기 초에는 젊은 권력자들이 등장한다.

술레이만 1세. 아버지 셀림의 죽음으로 1520년에 투르크 술탄에 즉위하며 ‘대제’라고 불렸다.

프랑수아 1세. 1515년에 프랑스 왕에 즉위하며 32년간 프랑스를 통치했다.

카를로스 1세. 1516년에 에스파냐 왕에, 1519년에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에 즉위한다. 신성로마제국은 에스파냐, 독일,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및 이탈ㄹ리아 반도의 사실상 지배자이다.

이런 16세기 파워게임에 빼놓을 수 없는 주인공으로는 베네치아공화국과 로마 교황이다. 베네치아공화국은 국제정치를 결정하는 현장에는 빠지지 않을 정도로 경제대국이었으며 해군력도 강했기 때문이다.

로마 교황은 무형의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베토리의 죽음과 함께 뒤를 이은 것은 안드레아 도리아였고 이슬람 쪽은 붉은 수염이라 불린 해적 바르바로사였다. 안드레아 도리아는 이탈리아 역사에서 손꼽히는 해군 중 한명이다.

이 안드레아 도리아는 로마의 교황청 해군 사령관에 있었다. 이 당시 플아스와 에스파냐는 서로 힘겨루기 중이었다. 사실 신성로마제국의 영토가 프랑스를 뒤덮고 있었기 때문에 프랑스아 1세는 걱정이 많았고 이 도리아에게 프랑스 남부 해상 방위를 부탁했다.

하지만 도리아는 해군을 이끌기 위해서는 명예보다는 보수가 중요했기에 결국 충분히 해군을 운영할 수 있는 에스파냐의 해군 총사령관에 취임한다.

도리아는 취임 후 투르크에 엄청난 손해를 입혔고 바르바로사는 아직 해군 제독인 입장으로 투르크 해군 전체를 다룰 수 없었다. 결국 투르크는 바르바로사를 해군 총사령관에 임명하게 된다.

카를로스 황제는 투르크는 해적을 이용했기 때문에 해적을 퇴치하기 위해서는 바다에서 그들을 처단하는 것이 아닌 본거지 자체를 공격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신성동맹이라는 기독교 연합은 해적의 본거지인 튀니스를 공격하기로 결정한다.

이렇게 튀니스에서 안드레아 도리아와 바르바로사는 큰 대결을 펼치게 된다. 결과적으로 신성동맹 연합의 승리였다. 카를로스의 허영심에 의해 바르바로사를 놓쳤지만 어쨌든 승리는 승리였다.

신성로마제국의 세력이 점점 커져가는 것에 두려움을 느낀 프랑스는 투르크와 동맹을 맺게 된다. 이 소식에 교황은 비탄에 바졌고 각국은 프랑스를 비난했다.

어쨌든 투르크는 이 동맹에 힘입어 다시 해군을 편성하고 바르바로사는 풀리아 지방에 상륙하게 된다. 이 때 안드레아 도리아는 플리아 지방으로 가는 보급을 끊기로 작전을 짜게 된다. 이 작전은 크게 성공하여 투르크에서 파견한 정예 예니체리 병사들도 포로로 잡게 된다.

어쨌든 큰 승리를 거두었지만 여전히 풀리아 지방에 투르크 군이 있는 것을 못마땅해 한 교황은 다시 연합군을 편성한다. 풀리아 지방에서 투르크 군을 몰아내는 것은 쉬웠다. 이 풀리아 지방을 다시 점령하자 에스파냐는 이 연합군에 참여할 이유가 사라졌다. 그래서 시간을 끌게 되고 자연스럽게 해산된다.

바르바로사에게는 투르구트라는 해적이 있었는데 그가 신대륙에서 오는 배들이 계속 나포한다는 소식이 카를로스의 귀에 들어간다. 그리고는 안드레아 도리아를 보내어 처리하게 했다.

안드레아 도리아는 81대의 갤리선을 다섯 함대로 나누어 투르구트와 마주칠 확률이 높은 해역에 배치했다. 역시 이 작전은 성공했고 투르구트를 체포했다. 하지만 돈을 받고 그를 다시 풀어줬다고 한다.

투르구트를 체포한 후에도 끊임없이 신대륙 배들이 나포되자 카를로스는 알제를 공격하게 된다. 지중해에서 안전하게 항해할 수있는 기간은 6, 7, 8, 9월 넉 달뿐이었다. 카를로스가 알제를 공격하기로 한 것은 7월이었다. 이미 시간이 부족했지만 카를로스는 무리하게 되고 어마어마한 손해를 입고 패전한다. 이 후 지중해는 다시 투르크 손에 떨어지게 된다. 프랑수아 1세, 카를로스 1세가 죽은 후 다시 지중해 탈환을 위해 해전을 벌이지만 여전히 패배하고 아무 성과가 없었다.

하지만 이런 투르크의 지중해 지배를 막은 것은 몰타 기사단이었다. 몰타 기사단은 로도스 섬에 있던 성 요한 기사단이었다. 기사단장 라 발레트는 투르크 군의 공격에 완벽한 대비를 했다. 또한, 투르크 군의 해군 사령관은 해전에 경험이 없는 술탄의 사위였다. 즉, 투르크 군의 패인은 몰타 기사단이 충분히 대비할 수 있는 시간을 주었다는 것과 전술 부족이었다.

술레이만의 뒤를 이은 것은 아들 셀림인데 그는 베네치아공화국령인 키프로스를 공격했다. 베네치아공화국과 투르크는 외교적으로 동맹을 맺은 상태였지만 그것을 일방적으로 깬 것이다. 키프로스의 포도주때문에… 하지만 키프로스의 서쪽만 점령했고 나머지 동쪽은 점령을 못했다.

이 때도 연합군을 결성했지만 누가 총 사령관을 맡을 것인가로 의견이 뭉쳐지지 않았다. 이 전 에스파냐의 안드레아 도리아가 총 사령관을 맡고 나서 시간끌기했던 전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모든 인선이 해결되고 레판토에서 투르크 군과 연함군은 해전을 벌인다. 연합군이 레판토 해전에서 크게 승리하게 되고 투르크 해군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하지만 여전히 해적은 남았다.

하지만 시대의 흐름은 이제 지중해에서 대서양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또한, 유럽의 신기술의 발명으로 북아프리카가 식민지가 되면서 투르크 역시 해적 금지 조항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게 된다. 이렇게 시대는 지중해에서 신대륙으로 가는 대서양으로 이동했다.

르네상스 시대로 문화가 꽃이 필 때, 밖으로는 유럽이 이렇게 힘들 것이라고는 생각치 못했다.
오스만 투르크가 이렇게 강력한 나라라고는 생각치도 못했고... 해적의 기원 역시... 처음 알게 되었다.
같은 종교라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단합될 수 있는 것을 보면서 종교가 없는 나에게는 신기함으로 다가왔다.
이들이 총기나 대포의 기술이 빠르게 발달할 수 있었던 기원은 아마 해적에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은 지중해를 기반으로 한 시대 흐름을 기술하고 있어 그 당시의 내적인 상황들이 큰 궁금점으로 남는다.
르네상스, 각 나라간의 관계 등등...
다음 번엔 바다가 아닌 육지의 상황에 관한 책을 찾아서 읽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