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편은 아우구스투스가 죽은 후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에 관한 내용이다. 악명높은 황제들 이라는 큰 타이틀로 작성된 이번 7편은 왜 악명높은 황제들일까? 라는 생각을 하면서 읽었다.

로마인 이야기 7편 - 티베리우스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자신의 핏줄이 너무 어려서 징검다리 역할로 티베리우스를 양자로 삼았고 그에게 뒤를 맡겼다. 티베리우스는 자신이 징검다리 역할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아우구스투스의 뜻을 그대로 따르려고 노력했다. 황제의 뒤를 이을 정도의 위치였던 티베리우스는 왜 자기만의 정치를 펼치지 않았을까? 라는 의문이 든다. 그 정도로 아우구스투스를 존경했고 범접할 수 없다고 생각했을까? 아니면 자신이 징검다리인 것을 알지만 ‘팍스 로마나’를 위해서는 아우구스투스의 생각과 방식이 모두 맞다고 생각한 것일까? 어찌됐든 아우구스투스가 정말로 대단한 인물이었던 것은 맞는 것 같다.

티베리우스는 지금의 로마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재정을 안정화시키기 위해서 긴축재정을 실행했고 기존에 존재했던 검투사 시합 등의 구경거리와 공공사업을 하지 않았다. 황제는 즉위 후 인기를 얻기 위해서 구경거리, 공공사업을 하는데 이미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많이 했기 때문에 더 할 것도 없었지만 계속적인 국고 낭비는 언젠가는 위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티베리우스는 시민들에게 평판이 매우 안 좋았다.

티베리우스는 아우구스투스가 엘베 강까지 국경을 확장하려고 했던 것들을 모두 중단하고 다시 라인 강까지 후퇴했다. 엄청난 국방비를 소모해 가면서 엘베 강까지 지키기에도 무리가 있었고 게르마니아를 완벽히 정복하는 것도 무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후퇴를 패배라는 느낌을 주지 않기 위해서 게르마니쿠스에게 개선식을 시키는 등의 최대한 패배가 아닌 듯한 느낌을 시민들에게 주었다. 한 국가를 운영하는 것은 정말 얼마나 어려울까? 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작은 조직을 운영함에 있어서도 서로의 의견을 통합하기 힘들고 만족시키기도 힘든데… 조직 구성원들은 대부분 자기만의 이익을 위해서 움직인다. 기본적으로 그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행동하기 때문에 불만이 생기고 그 불만이 터지면 반란이나 지금의 시위로 이어지는 것이라고 본다. 그렇기 때문에 리더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보고 싶은 것과 보고 싶지 않는 것을 볼 줄 알아야만 하는 것 같다. 그들의 이익을 최고로 충족할 수 있는 방향을 끊임없이 생각해야 한다. 그게 리더인 것 같다.

이렇게 게르마니쿠스를 개선시킨 후 동방의 오리엔트로 보낸다. 이유는 당연히 파르티아 왕국때문이다. 이 나라는 로마만큼 강하진 않았지만 주변 로마 동맹국들에게 충분히 영향을 줄 수 있는 나라였다. 아우구스투스가 이 나라와 외교를 맺은 후 다시 외교를 맺어야 할 시기였고 그 주변국들의 왕이 죽고 후계자 결정 등을 해서 파르티아와 로마의 경계를 확실히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게르마니쿠스는 젊은 나이에 죽었는데 그 당시 피소 총독에 의한 독살이라고 판명됐다. 사실 지금은 말라리아라고 알려져 있지만… 피소 총독은 시리아 속주를 담당하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는 원래 오리엔트의 최고 통치권을 가진 사람이었는데 게르마니쿠스에 의해 빼앗긴 셈이 된 것이다. 이로 인해 피소는 게르마니쿠스의 의견에 사사건건 참견을 했고 사이가 나빠졌다. 게르마니쿠스가 열이 나고 서서히 죽었는데 다들 피소가 독살한 것이라고 생각했고 본인도 그렇게 생각했다고 한다. 그 후 피소는 재판에 회부됐고 판결 아침… 피소는 자살했다.

이 후 티베리우스는 ‘팍스 로마나’를 위한 다양한 활동을 했다. 재해 정책, 세금 정책, 시민들의 안전보장 등에서 볼 수 있다. 재해가 일어난 곳의 세금과 복구에 대한 정책과 함께 세금을 높이지 않고 다른 방법으로 나라를 운영하려고 하는 생각, 시민들의 안전을 위한 유지보수 작업 등이 있다. 티베리우스 역시 다양한 종교를 인정했고 서로에게 강요하지 않으면 괜찮다는 생각을 가졌다. 티베리우스에게 가장 부족한 점은 나를 좋게 포장하고 자랑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무리 좋은 일을 하고 노력했지만 시민들에게 인기가 없었다. 또한, 시민들과 원로원이 신격화 하려고 하자 거절했다고 한다. 그는 그만큼 일은 하지만 티는 나지 않게 하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사람에게는 성향이라는 것이 있다. 그리고 잘하는 부분, 못하는 부분이 있다. 내가 한 것을 자랑하고 싶어하는 사람, 내가 한 것을 알리지 않고 스스로 만족하는 사람… 표현하지 않으면 모른다고 한다. 지금 느낀 것은 내가 한 것을 알려야 하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때로는 이게 겸손하지 않은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할 수 도 있다. 하지만 겸손은 내가 한 것을 했다고 표현하지 않는 것이 아닌 다른 사람들을 존중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티베리우스는 가족관계와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좋지 않았다. 항상 홀로 지내온 그는 황제로서의 다양한 일에서 느낀 피곤함으로 인해 카프리 섬으로 은둔하게 된다. 하지만 그는 세야누스라는 자신의 측근을 로마에 남겨두었다. 세야누스는 근위대장이었다. 근위대는 황제 직속 부대였기에 그 만큼 권력도 있었고 티베리우스는 그를 통해 로마를 통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원로원과 시민들에게 완전히 인기를 잃었다. 이런 말이 생각난다. 왕관을 쓰려는 자, 그 무게를 견뎌라. 티베리우스가 완전히 통치를 포기한 것은 아니지만 로마를 떠났다는 것은 그 무게를 견디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나도 과거에 이러한 다양한 무게를 견디지 못해 도망친 적이 몇 번이나 있었다. 그 때 그 무게를 견디려면 어떻게 했어야 할까? 진심으로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항상 옆에 있었다면…?

아그리피나는 게르마니쿠스의 아내였는데 게르마니쿠스가 죽고 난 후 드루수스에게 왕위가 물려질 것을 걱정한 탓에 반 티베리우스 파를 결성했다. 하지만 큰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고 반 티베리우스 파는 세야누스에 의해 정리되었다.

세야누스는 자신의 권력에 심취해서 스스로 파멸의 길로 들어간 케이스 중 하나이다. 자신이 티베리우스의 뒤를 이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러한 그의 행동은 ‘국가 반역죄’라는 형태로 이어졌다. ‘이용가치’라는 말이 여기서 나오는데… 여기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사실 어떤 관계든 깊이 들어가 보면 서로에게 이용가치에 의해서 움직인다고 할 수 있다. 당장 이용가치가 없다고 하더라도 나중에 이용가치가 생길 수 있기 때문에 관계가 유지될 수 있다. 이런 이용가치라는 말이 참 기분나쁘게 다가오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끝까지 유지하기 위해서는 서로에게 ‘이용가치’를 남겨두어야 한다. 하지만 ‘이용가치’가 없어져서 끊어진 관계에 너무 마음쓰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런 부분에 스트레스를 받는 것 만큼 힘든 일도 없기 때문이랄까?

이렇게 티베리우스는 고독했지만 로마 제국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 죽은 후에는 칼리굴라에게 뒤를 맡겼다. 아들 드루수스에게 물려주고 싶었으나 젊은 나이로 죽었기에 뒤를 맡길 수 없었다. 티베리우스가 죽었을 때 로마인들은 정말 기뻐했다. 이유는 그의 성격과 행동이 그들에게 인기를 끌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티베리우스 만큼 훌륭한 황제가 없다고 할 정도로 인정받고 있다.

리더가 칭찬을 받기는 정말 힘든 것 같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는 정말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을 주면서 자기의 이익을 몇 배로 채우는 능력이 있었지만 보통은 그렇지 못하다. 티베리우스가 왜 악명높은 황제로 분류되었을까? 내 생각으로는 먼저 일단 원로원과 시민들에게 인기가 없었다. 너무 옥죄면 아무리 결과가 좋아도 불만이 생기고 욕을 한다. 아마 이런 이유가 크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또한, 카프리 섬으로 도피한 점을 들 수 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리더가 자신이 있어야 할 장소를 버리고 도망간 경우는 없다. 아무리 로마 제국을 반석에 올려놨다고 하더라도 잘못된 것은 잘못된 것이다. 마지막은 첫 이유와 일맥상통 하지만 표현의 방법이다. 티베리우스는 원로원의 무지를 직접적으로 지적했다. 스스로가 잘 못하는 것을 인지하고 있더라도 그 것을 지적받으면 기분이 나쁘다. 다르게 표현하면 어땠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여기까지가 티베리우스 황제의 이야기다. 앞으로 무너져 가는 황제들의 모습을 보면 짜증이 난다. 티베리우스를 이은 칼리굴라 황제는 어떤 황제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