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리굴라 황제는 얼마나, 왜 악명높은 황제일까? 라는 생각을 하면서 읽었다.

로마인 이야기 7편 - 칼리굴라 황제

칼리굴라는 24세에 황제가 됐다. 시민들은 아우구스투스의 핏줄을 이어받은 사람이 황제가 됐는 것에 매우 기뻐했다. 칼리굴라(작은 군화)라는 이름은 게르마니쿠스가 라인 강 근처 군단에 보내졌을 때 병사들에게 불리던 이름이다. 즉, 그는 티베리우스 황제가 반석에 올려놓은 로마를 그대로 잘 받아서 다스리기만 하면 된 것이다. 하지만… 칼리굴라는 로마 운영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자신의 인기를 더 끌기 위해서 국가 재정에 관한 생각은 하지 않고 정책을 폈다. 원래 있던 세금을 폐지하고 국고를 낭비하는 사업만을 꾸준히 시행했다.

나는 사람에게는 그 나이에 따라 볼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
당연한 이치이지만 나의 20대를 생각해보면 자신감, 자존감이 높았고 거기에 자만심 역시 강했다.
그래서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다른 사람보다 내가 무조건 잘한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지금 30대가 되면서 느끼는 것은 세상에는 나보다 뛰어난 사람은 수없이 많다.
그리고 이를 알게되면서 누구나 개개인이 가진 장점이 있고 이를 찾고 존중하려고 노력하게 됐다.
즉, 겸손함을 배운 것이다. 칼리굴라는 너무 젊은 나이에 황제가 됐다.
그래서 큰 로마 제국을 통치하기에는 아직 식견이 부족했다고 생각한다.

칼리굴라가 로마를 제대로 운영하지 못한 것은 맞지만 사람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어릴 때 아버지를 여의였고 그 주모자가 피소이며 피소를 사주한 것이 티베리우스라고 믿었다. 그래서 티베리우스를 증오하면서 살았다. 또한, 그이 어머니인 아그리피나와 티베리우스의 사이는 더욱 악화되는 과정을 봤다. 즉, 그의 어릴 적 시절은 순탄하지 않았고 사람들의 사랑을 많이 받고 자라지 못했다. 이러한 이유때문인지 그는 시민들의 인기에 얽매이게 됐다. 어떻게든 이 인기를 유지하기 위해 7개월 간 축제를 벌이고 전차 경주를 개최하는 등 시민들이 좋아하는 일만 했다. 이렇게 국고를 낭비만 한 그는 로마의 국고가 바닥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더 이상 버틸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 후, 그는 교묘하게 세금을 부과하거나 황실의 가재도구와 폐물을 팔거나 노예를 경매에 내놓기도 했다. 또한, 이러한 것이 로마 시민의 귀에 들어가는 것이 두려워 갈리아 지역에서 시행했다.

이런 경우 때문에 세습을 위해 따로 교육을 시키는 것인가? 라는 생각이 든다.
대부분 재벌들의 자제들은 해외 유학을 가거나 다양한 공부를 시킨다. 특히 경영학으로...
아마 회사를 경영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세계를 보고 인맥을 갖추어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자식에게 회사를 물려주어 제대로 경영되지 못해 망한 경우가 많다.
칼리굴라가 이런 케이스가 아닐까? 한다.

이런 칼리굴라는 아버지인 게르마니쿠스가 이룩하지 못한 게르마니아 제패를 시도했다. 당연히 정복한 속주를 통해 국고를 채우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큰 병력을 움직이는데는 엄청난 돈이 들어간다. 결국, 그는 군대를 움직여 놓고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돈만 쓰고 로마로 돌아오게 된다.

이 책은 로마와 유대교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로마는 유대교를 어떻게 대했는가? 가 매우 중요한 요소인 것 같다. 그 이유는 유대교가 유일하게 ‘보편’이 아닌 ‘특수’한 종교였기 때문이다.

유대교는 유일신으로 로마와 완전히 상충된 종교관을 가졌다. 로마는 어떤 종교를 가져도 좋다라는 생각을 가진 반면 유대교는 오직 유일신만을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유대는 이미 로마의 속국이다. 이런 속국이 로마의 ‘보편’을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로마는 항상 유대교를 인정해 주었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무슨 종교를 믿든 개인의 자유라는 것이다. 로마인과 유대인은 딱히 큰 충돌은 없었다. 하지만 그리스인과 유대인의 사이는 정말 좋지 않았다.

유대인이 생각보다 너무 똑똑해서 그리스인이 자치하고 있던 많은 분야를 빼앗아 갔기 때문이다. 즉, 서로 너무 똑똑해서 항상 경쟁했다. 그래서 그리스인과 유대인은 항상 싸웠지만 티베리우스 황제는 로마인 답게 처리했고 칼리굴라 역시… 유대교 자체를 그대로 인정해주었다. 사실 칼리굴라는 자신을 신격화 시켰는데 유대교는 이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싫어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유대교 자체를 배척하지 않았기에 그대로 인정해주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하지만 배척과 달리 유대인들에게 허용되지 않는 행동을 꾸준히 했다. 다행히 시리아 총독 퀴리누스와 페트로니우스 총독의 임기응변으로 폭동은 막았지만…

사실 사람은 누구나 상식이외의 행동을 한다.
내가 지금까지 읽은 로마인 귀족은 책을 많이 읽었고 가정교사를 통해 교육을 받았다.
다들 식견이 높고 의식 수준도 높다. 칼리굴라는 어린 시절 이런 것을 배우지 못했던 것 같다.

이렇게 칼리굴라는 인기만을 위한 정치를 펼치다 결국 스스로 파멸하게 되었다. 자신을 호위하던 근위병에게 살해당했고 그는 무덤이 어디인지도 모르는 곳에 묻혔다.

칼리굴라가 정말 국고를 낭비하고 정치를 멋대로 해도 무너지지 않는 거을 보면서
얼마나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가 로마라는 나라를 잘 다스렸는지도 알 것 같다.
지금의 정치와는 많이 다르겠지만 인기만을 위한 정치는 오래가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다.

칼리굴라 이후 황제가 된 클라우디우스는 과연 어떤 정치를 펼칠까? 그는 장애를 가졌다고 하는데도 칼리굴라, 네로 황제에 비해서 로마를 잘 다스렸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