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현제의 시대의 두 번째 황제 트라야누스 황제. 그는 과연 어떤 황제였고 왜 최고의 황제 중에 한 사람이었을까?

로마인 이야기 9편 - 트라야누스 황제

트라야누스는 최초의 속주 출신의 황제이기 때문에 그의 아버지 세대에서 부터 역사적 기록이 남아있다. 트라야누스의 아버지는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천거로 인해 원로원이 되었다. 아버지가 원로원이 된 후에 트라야누스 자신의 처지도 급격히 올라가게 되었다. 젊은 나이에 수석 대대장이라는 위치에 올랐고 시리아 속주 총독이 된 아버지 밑에서 지내게 된다. 그리고 몇년 후 트라야누스는 라인 강 근처의 최전방으로 보내어 진다. 약 4년 간 최전방에서 지낸 트라야누스는 로마의 엘리트 코스를 28살 때 부터 밟게 된다. 운도 좋았다. 고지 게르마니아 사령관 사투르니누스가 반란을 일으켰고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트라야누스에게 지원을 요청한게 되며 그는 황제에게 인정받아 집정관이 될 수 있었다. 집정관 임기 후 고지 게르마니아의 사령관으로 부임했다.

로마는 속주에게도 많은 기회를 주기 시작했고 이런 정책이 정착된 지 꽤 지났다.
그래서 누구나 이제는 원로원의 기회를 얻을 수 있고 트라야누스 가문은 그 기회를 잘 잡은 것 같다.
사실 황제에 등극하기에는 아직 힘들 수는 있지만 그의 가문은 그래도 원로원 출신의 가문이 됐다.
즉, 엘리트 코스를 밟기에 좋은 환경에 태어나서 자란 것도 사실이며 딱히 그의 재능이 좋았다고 하기 힘든 것 같다.

그는 네르바 황제가 죽은 후 차기 황제가 되었지만 로마로 귀환하지 않았다. 당시 고지 게르마니아에 있으면서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게르마니아 방벽’을 완성시켜야 한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고지 게르마니아는 자신이 5년 간 있었기 때문에 방위 체계를 끝냈지만 아직 저지 게르마니아 쪽은 불완전했다. 그래서 트라야누스는 1년 반 이후 로마로 귀환하게 된다.

트라야누스의 특징 중에 하나는 걷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이다. 보통 황제들은 가마를 타거나 전차를 타거나 했지만 그는 첫 귀환에서도 말에서 내려서 성문을 들어갔을 정도로 권위적인 것을 피했다. 이는 원로원들과 시민들에게 큰 호감을 샀다.

재능이 좋았다고 하기에 무리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가 한 행동들을 보면 남다르다.
최초의 속주 출신 황제인 만큼 그 배경을 잘 이용했고 이미지 메이킹에 성공했다고 생각한다.
무엇이든 첫 인상이 중요하다.
이런 첫 인사과 함께 너희와 나는 다르지 않다라는 인식을 주었다는 것에 놀랐다.
또한, 게르마니아 방벽을 완벽히 구축해 놓은 것도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군단 내에서의 이미지 메이킹을 위한 것도 포함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을 해본다.

트라야누스는 로마의 공동화 문제에 대한 정책도 실시했다. 공동화란 속이 텅 비게되는 것인데 이 말인 즉, 로마의 귀족이나 경제 계급들이 로마에 투자하는 것이 아닌 속주에 투자함으로써 로마에서 돌아야 할 돈이 밖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의미했다. 이를 막기 위해서 투자금의 제한을 두고 이탈리아 내부에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주는 은행과 같은 시스템을 만들어 저금리 대출을 해주는 방법을 사용했다. 또한, 육영자금제도를 만들었다. 트라야누스는 자신이 큰 돈을 먼저 기부하여 차세대 육성을 위한 노력을 실시했다.

그리스 아테네가 망한 이유는 똑똑했던 그들이 외부로 많이 유출되어 공동화 되었기 때문이다.
똑똑한 사람들이 모두 돈을 벌기 위해서 외부로 유출되면 그 결과는 뻔하다.
내부의 운영은 평범한 사람들이 하게 되고...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트라야누스는 이를 방지하기 위해 차세대 육성하는데 노력했다는 점에서 특이하다고 생각한다.

다키아 정복은 로마에 있어 여전히 남아있는 주된 문제였다. 트라야누스는 평화협정을 한 다키아 근처에 군단을 주둔시켰고 여기에 위기를 느낀 다키아는 실수로 먼저 로마를 공격하게 되어 로마에게 명분을 주게 된다. 이후 트라야누스는 다키아를 공겨하게 되고 여기서 ‘트라야누스 다리’가 만들어졌다. 이 다리는 석조로만 된 큰 다리로 역대급 다리이다. 이 때 아폴로도로스라는 건축가를 기용했다. 이 아폴로도로스는 로마의 정말 유능한 건축가였다. 이렇게 제 1차, 2차 다키아 전쟁을 통해 다키아를 속주로 만드는데 성공했다.

다키아 전쟁기에 관해 남아있는 저서가 없지만 다행히 트라야누스 원기둥에 이 모든 내용이 부조화 되어있다.
사실 외부의 어느 나라도 로마의 군단을 이길 능력은 없었다.
이기는 것은 당연했지만 그 이유는 로마의 체계적인 준비와 제도에 있었다.
모든 군단은 항상 전쟁 시와 비슷하게 운영되었고 각각의 훈련 체계가 잡혀있었다.
다른 나라의 군단이 이길 수 없는데에는 고된 훈련과 항상 전쟁과 같은 마음가짐이 아니었을까?
나도 이런 작가의 생각에 공감하고 항상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시대에 로마만큼 의식 수준이 높은 국가는 어디에도 없었다는 뜻이 된다.
그 만큼 로마는 지금에 비추어 봐도 뒤지지 않을 정도의 의식 수준을 가진 국가라고 나는 생각한다.

트라야누스 역시 공공사업으로 자신의 포룸을 지었다. 이 때도 아폴로도로스가 모든 건축을 담당했다. 이 포룸은 지금까지 지은 포룸 중에 가장 컸다. 트라야누스는 로마에만 공공사업을 한 것이 아닌 각 속주에도 공공사업을 실시했다. 이때, 플리비우스라는 사람이 속주 총독을 하면서 트라야누스를 많이 보필했고 항상 문제가 있을 때에는 트라야누스에게 확인을 받았다. 트라야누스는 플리비우스를 이용한 느낌이지만 플리비우스는 의심없이 충성을 다했다.

트라야누스는 파르티아 원정도 나섰다. 이 역시 파르티아를 통치하던 티리다테스가 죽고 난 후에 후계자를 이으면서 생긴 문제였다. 당연히 트라야누스는 파르티아를 정복했다. 하지만 트라야누스가 개선할 때를 맞춰 파르티아에 속한 각 부족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이를 막지 못한 로마는 파르티아를 완벽히 정복하지 못한채로 이전의 국경으로 돌아갔다. 이에 충격을 받고 나이도 든 상태였던 트리야누스는 로마로 돌아가던 중 시름시름 앓다가 죽게 된다.

파르티아 원정에 성공했다고 알렸지만 바로 반란이 일어나고 그와 동시에 유대에도 반란이 일어났다고 한다.
드디어 이룩한 파르티아 정복이 바로 무너진 느낌은 어떤 것일까?
60대의 노인이라 이런 충격에 버티기 힘들었던 것일까?
자신의 위대한 업적을 남기고 싶어한 욕심이 엄청 컸던 것은 아니었을까?
항상 시민과 원로원에게 호감의 이미지를 사려고 노력했지만 사실은 큰 업적을 남기고 싶어했던 그였다.
그리고 그 최고봉은 아마 파르티아 원정이 아니었을까?
항상 이런 실패의 내용이 나오면 나는 카이사르를 생각한다.
과연 카이사르가 살아있었다면...?
사실 지금 황제들이 해오는 모든 것은 카이사르가 죽기전에 해야겠다고 생각했던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그는 천재였던 것 같다.

이 후 하드리아누스 황제에 등극하게 됐다. 그는 ‘기록말살형’에 처해질 뻔까지 한 황제였지만 나이가 들기 전에는 현제라고 불릴 만큼 정치를 잘했다고 한다. 과연 그는 어떤 황제였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