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인 이야기 9-2편 - 현제의 세기
by Seungbeom Kim
오현제의 시대의 세 번째 황제 하드리아누스 황제. 그는 과연 어떤 황제였고 왜 최고의 황제 중에 한 사람이었을까?
로마인 이야기 9편 - 하드리아누스 황제
하드리아누스는 트라야누스 가문보다는 일찍 등용되어 활약했다. 하지만 하드리아누스는 평범한 시골에서 자랐으며 아버지가 죽은 후 트라야누스와 아킬리우스 아티아누스가 후견인이 되었다. 이 두 사람의 관심에 의해 하드리아누스는 제대로 된 교육을 받기 시작했고 그리스 문화의 훌륭함에 눈을 뜨게 디었다. 너무 그리스 문명에 심취했던 것을 걱정한 두 후견인은 하드리아누스를 고향 이탈리카로 다시 보냈다. 당시 그리스 문명에 열중하는 것은 연약함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후 이탈리카로 간 하드리아누스는 갑자기 사냥에만 열중하기 시작했다. 이런 이유로 하드리야누스의 가장 큰 취미는 그리스 문명과 사냥이 되었다.
맹자삼천지교라는 말이 생각났다. 역시 환경이 정말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도 후견인이라는 말이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지만 귀족, 재벌에는 아직도 남아있을 것 같다.
어쨋든 하드리아누스 역시 좋은 가문, 인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스스로 기회를 잡고 올라간 사람은 어떻게 이런 큰 기회를 잡을 수 있는 것일까?
카이사르가 가장 가까운 인물인 것 같다. 귀족이긴 하지만 스스로 모든 길을 개척했다는 부분에서...
하드리아누스는 트라야누스와 마찬가지로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어린 나이부터 막중함 직책에 오르며 그 부담감을 이겨내는 훈련을 했고 잘 이겨냈다. 그는 라틴어에 시골 사투리가 섞여 있는 것에 대해 비웃은 원로원의 반응때문에 라틴어를 열심히 공부하여 도회적 수준까지 이르게 되었다. 트라야누스는 2차 다키아 전쟁 때 하드리아누스에게 중책 맡겼고 이를 훌륭하게 수행하여 그의 명성을 드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그 후 집정관에 취임하며 탄탄대로를 걷지만 나이가 젊고 주변의 시기에 의해 집정관 후 속주 총독으로 취임하기 까지는 4년이라는 시간동안 기다려야 했다.
하드리아누스가 다시 제일선으로 복귀할 수 있었던 것은 트라야누스의 아내 플로티나의 추천때문이였다. 플로티나는 하드리아누스의 젊음에서 뿜어져 나오는 아름다움을 사랑했다고 한다. 하지만 육체적 관계는 섞이지 않았다고 한다. 어쨋든 이 둘의 관계는 서로 존중이 바탕되어 있었다.
이런 유명한 인물들이 일하고 훈련하고 공부했던 방식이 궁금하다.
돈이 많아서 주변에 교육자를 많이 고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일까?
지금은 구글, 유투브가 선생님이 된 시대이다. 이런 툴을 잘 활용하는 방법을 좀 더 깊이 고민해야 겠다.
트라야누스가 죽은 후 황제가 된 하드리아누스는 처리해야 할 문제들이 많았다. 유대 문제, 브리타니아 문제, 파르티아 문제 등 전부 반란과 관련된 문제였다. 파르티아 문제는 간단하게 끝나는 것이 아니기에 결국 예전 티베리우스 황제가 게르마니아 땅에서 철수할 떄와 비슷한 방법을 사용했다. 그 결과 결국 파르티아를 정복하기 전으로 그대로 돌아갔다.
하드리아누스는 로마로 귀환하기 전에 트라야누스 파의 4명의 중신이 암살을 모의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는 아티아누스에게 처리하라고 명령했고 그 들은 모두 살해당하게 된다. 하지만 하드리아누스는 황제로서의 첫 시작이 4명의 중신 살해로 시작하는 것을 매우 언짢아 했다. 그래서 이를 무마하기 위해 아티아누스를 근위대장에서 해고하고 멀리 보냄으로써 해결했다.
유르스나르라는 작가는 '하드리아누스의 회상'이라는 책에서 이 당시 이들 단 둘이 나눈 대화를 상상하여 글로 남겼다. 유르스나르와 시오노 나나미의 관점의 차이를 느낄 수 있었고 유르스나르의 필력에 감탄했다.
해결했다고는 하지만 이미 원로원과 시민들은 냉담했다. 그래서 그는 황제 취임 기념으로 시민에게 주는 보너스액을 증액했고 세금 체납 문서를 태워 모든 체납액을 0으로 만들었다. 이와 동시에 15년 만다 부동산 등기를 다시 하기로하여 과세액을 부가하기로 했다. 당시 30-40년 마다 국세조사를 했기 때문에 그 사이에 재산가치 변동에 대한 세금을 못내는 사람이 매우 많았다. 이런 정책들로 인해서 냉담했던 분위기를 1년 사이에 크게 변화시켰다.
사실 체납액을 0으로 시작하는게 잘 한 것이라고 시민들은 생각했을까? 의문이 든다. 만약 저 때 불만이 많지 않았다면 대부분 세금을 체납했거나 체납액을 못내는 상황이었거나... 둘 중 하나이다. 시민이 벌어들이는 수익에 비해서 부동산 가격이 훨씬 높았다는 이야기일까?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정말 잦은 순행을 다녔다. 7년 빼고 나머지 기간은 전부 로마 전역을 돌아다닌데 사용했을 정도였다. 그는 순행하면서 직접 보고 부족한 부분을 보완해 나가는 방식을 사용했다. 그래서 그는 ‘지칠 줄 모르는 일꾼’으로 불렸다.
그는 순행하면서 가장 먼저 라인 강 방위선을 재구축했다. 일단 군단의 모든 인선을 실력위주로 했다. 훈련은 실전처럼, 비훈련시에도 긴장을 늦추지 않게 하려 노력했고 식량관리(재고가 남아 썩지 않도록 하기 위해)를 제대로 하기 위해 보급로 조직화를 했다. 또한, ‘누메루스’라는 계절 노동자같은 병사단을 꾸려서 군단을 늘리거나 보조병을 늘리기 보다는 로마군 안에서는 속주민이 로마인을 넘지 못하도록 했다.
하드리아누스의 문제 해결은 공통적으로 군단기지 내부의 책임체계를 명확히 하는 것이었다. 조직의 기능을 향상시키려면 책임 소재를 분명이 해두는 것이 선결문제였기 때문이다. 이후 하드리아누스는 브리타니아로 간다. 그는 거기에 하드리아누스 방벽을 지었다. 이 방벽은 후에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분리로 이어졌다.
이런 순행은 아테네로 이어진다. 하드리아누스는 안티노라는 젊은 그리스 소년에게 사랑에 빠졌다. 그리스 문화를 사랑하면 미소년에 대한 사랑에 도달해버린다 해도 좋을 정도로 그리스에는 미소년을 사랑한 사람이 많다. 꽤나 오랜 기간 그리스를 탐방한 후 잠시 로마에 들리고 바로 북아프리아로 갔다가 다시 로마로 돌아온다.
내가 정말 원하던 리더의 모습이다. 직접 보고 함께하며 문제를 해결하고 나아가는 방식.
체력은 고갈될지 모르지만... 근본적 문제를 찾고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대기업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가 바로 책임전가라고 생각한다.
지금 사회에는 책임지기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이 보인다... 왜...?
두려우면 두려운 만큼 더 노력하면 되지 않나...? 아직도 나는 너무 이상적인가?
하드리아누스는 그리스에 푹 빠져있었다. 그런 그의 첫 아테네 방문의 느낌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 같다.
동성의 미소년을 사랑하게 되는 그 느낌은 잘 모르겠다. 그리스 문명에 무뇌한이라서 모를 수도 있겠지만...
다양한 책을 읽겠지만 나중에 그리스에 관한 책도 꼭 읽어보고 싶다.
그들의 문명은 도대체 얼마나 뛰어난 것이었을까?
로마로 돌아온 그는 ‘로마법 대전’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 로마법 집대성 작업을 맡긴 법률학자는 네라티우스 프리스쿠스, 유벤티우스 켈수스, 살루비우스 율리아누스 세 사람이다.
베누스와 로마 신전을 만들었는데 두 신을 따로 모시는 방식으로 만들었다. 한쪽은 로마 신 제단을 다른 한 쪽은 베누스 신 제단을… 독창적이었지만 로마인에게는 인기가 없었다. 그리고 그는 ‘빌라 아드리아나’라는 별궁을 지었다. 그 규모는 어마어마하다고 한다.
그 후 다시 하드리야누스는 순행에 떠나게 된다. 이 때 플라비우스 아리아누스라는 인물을 함께 데려갔고 그는 6년간 전선 방어를 하는 어려운 임무를 훌륭하게 수행했으며 문무를 골고루 갖춘 인물로 평가된다. 그래서 그는 후대 황제에 이르기 까지 아테네를 다스린 인물이 되었다.
파르티아와의 외교도 다시하고 이집트 도서관에 방문하고 연구자들과 심포지엄을 열어 토론도 열었다. 또한, 유대 반란을 해결하여 유대를 팔레스타인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 후 로마로 돌아온 그는 나이가 많이 들면서 평정심을 잃기 시작한다. 그리고 화를 자주 내며 시민들과 원로원과의 소통의 문이 점점 닫혀지게 된다. 그리고 후계자 문제에 있어 원로원의 비판도 받게 되었다. 몇 번의 우여곡절 끝에 그는 안토니누스 피우스를 후계자로 삼게된다.
하드리아누스는 정말 제대로 된 치세를 보여줬지만 그의 인생 마지막은 아쉽다고 말할 수 밖에 없다.
원로원과 시민들 모두에게 신망을 잃고 기록말살형에 처해질 뻔했으니...
하지만 그의 순행은 정말 제대로 된 치세라고 생각한다.
신뢰를 쌓는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잃는데는 5분도 걸리지 않는다. 라는 말이 생각난다.
인간이란 참 단순하고 가까운 것밖에 보지 못하는 것 같다.
사실 나는 로마인 이야기를 읽으면서 계속 리더의 자질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다.
이런 나의 생각이 이상적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정말 대기업에 들어갔을 때 이런 리더의 자질을 갖추어 변화를 위해 노력하는 것이 이상적일까?
시간이 오래걸릴 것이라는 것은 알고 있다. 그 위치까지 가려면 적어도 10년 이상 걸린다.
상사는 나에게 차라리 그런 공부보다 술을 늘리고 인맥을 넓히려고 노력하고 한다.
이 말은 윗사람에게 잘 보이라는 뜻인데... 그 부분에서는 술이 꼭 필요한 것일까?
모든 세상이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은 아니지만 정말 어려운 부분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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