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인 이야기 10-3편 -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by Seungbeom Kim
이번 편은 로마의 인프라에 대한 내용이 전부이다. 작가는 이 인프라를 통해 로마인이 생각한 ‘공’과 ‘사’에 대한 사고방식을 풀어나가려고 한다. 과연 이 인프라는 로마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로마인 이야기 10편 - 의료와 교육
앞 내용은 하드웨어 인프라에 대한 것이었다면 이 글은 로마의 소프트웨어 인프라인 의료와 교육이다.
로마에는 현재의 대학 병원이나 국립 병원이라는 형태를 찾아보기 힘들다. 초기에는 집안의 가장이 의료에 대한 부분을 담당했었다. 가장은 자신의 가족과 노예에 대한 의료를 책임졌다.
로마인는 온천을 통해 자신의 위생을 관리했고 이를 통해 병을 예방했다. 그리고 지금도 건강이 안 좋으면 신에게 비는 경우가 있듯 로마도 마찬가지 였으며 이 온천 근처에 그런 신전이 많았다.
사실 잘 씻는 것만으로 병은 예방된다는 것을 이 당시 로마인은 알았던 것이다.
정말 놀랍지 않은가? 수도의 개발로 온천이 생기고 온천으로 위생을 지킨 로마인이.
정말 알고 모르고의 본질의 차이는 어디서 시작되는 것일까...?
이렇게 가정, 신에게 의지하는 의료 형태에서 큰 변화를 가져온 것은 율리우스 카이사르 시대부터이다. 그가 의료, 교육분야에 종사하는 속주 사람들에게는 로마 시민권을 부여한 것이 바로 큰 변화의 시작이다. 이런 부분에서 의료는 ‘공’의 분야가 아닌 ‘사’의 분야였다. 하지만 이렇게 의료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군단에도 의료진을 배치할 수 있었고 그 외 다른 부분(소방서, 경찰서)에서도 의료진을 배치할 수 있었다. 당연히 가정에서의 의료는 소규모 병원에서의 의료로 변화했다.
티베리우스 황제 시대부터 의료는 가정의, 개업의, 군의로 확실히 구분되었다. 각 분야의 의사에 따라 의사가 버는 수입은 달랐지만 일반 시민들에 비해서는 압도적으로 돈을 벌었고 이를 비판하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의료 교육을 실시하는 곳은 로마에 존재하지 않았고 소아시아 근처의 오리엔트에 존재했다. 모든 의료 교육기관은 국가 비용으로 운영되었으며 특히, 이집트의 ‘무세이온’은 황제의 보조금으로 운영되었다. 이렇게 의학의 발달은 의학 분야를 세분화하는데 기여했다. 하지만 당시 시민들은 몸이 아플 때 어느 전문의를 찾아가야 하는 것인지에 대해 고민을 했고 이에 대한 불평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로마는 개인 병원이 많았는데 속주는 어땠을까? 속주에는 군단이 있다. 그 군단에는 의료시설이 있었고 병사들만 치료받는 것이 아닌 그 주변 시민들도 군단 의료시설을 이용했다. 로마의 의료 병실은 최대한 환자의 안정을 위해 설계되었다고 한다. 특히, 소음 관리를 위해 노력한 모습이 보였다.
여기서 또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놀라게 된다.
카이사르가 또 카이사르했다.
로마인들의 공감능력은 참 남다른 것 같다. 환자를 위해 소음에 신경쓴 구조.
쓰진 않았지만 넓은 통로. 현대 병원 통로를 생각해보면... 로마시대에 이미 통로가 넓었다.
항상 조금 더 생각하고, 배려하고, 관찰해야겠다.
대부분 개인 병원에서 진료를 받던 로마의 의료는 4세기에 접어들면서 변화했다. ‘기독교’가 중심이 되는 시대가 되면서 ‘유일신’의 문화가 된다. 하지만 당시 로마인들이 자신이 믿는 다양한 신들에게 병을 낫게해달라고 하는 관습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기독교’의 취지와 맞지 않았따. 즉, 이를 제재하기 위해 의료 시스템을 국가가 부담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의료비용의 국가 부담은 당시 로마 재정에 큰 타격을 주었다고 한다.
기독교화 되기 전과 후의 로마가 가진 ‘가난’에 대한 개념의 차이는 아래와 같다.
전 : ‘가난은 수치가 아니다. 하지만 가난에 안주하는 것은 수치다.’ 후 :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즉, ‘사’에서 ‘공’으로 옮겨지면서 기독교에서 주장하는 ‘자애’가 중요시 되었고 이는 현대의 ‘인권’으로 변화한 것이다. 즉, 의료는 인간의 기본권이라는 것이다.
사실 현재 미국을 보면 의료 민영화의 단점이 극명히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당시 로마에서는 민영으로 운영되는 것이 더 시대적으로 알맞은 것 같다.
로마인들은 '더 오래 살고 싶다.'라는 욕망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프면 아프구나. 죽음에 초연했고 죽음이 다가왔을 때는 그냥 받아들이는 문화였다고 한다.
그래서 민영으로 운영되어도 지금처럼 치료 비용을 부담할 수 없어서 죽어간다라고 인식하기보다
그냥 죽을 때가 되서 죽는구나라고 인식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교육도 의료와 비슷하다. 초기에는 가정에서의 교육이 전부였다. 하지만 이후 가정교사의 개념이 생긴다. 당시 그리스 문명이 다른 지역에 비해 뛰어났기 때문에 가정교사는 대부분 그리스어와 문명을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면 그리스의 ‘브레인’들은 왜 하필 로마로 이동했을까? 로마보다 카르타고가 훨씬 잘 살았기때문에 교육자로 활동했을 때 돈도 더 많이 벌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그 이유는 바로 개방과 폐쇄의 차이이다. 로마는 그리스 문명에 개방적이었고 그리스어를 배우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카르타고는 폐쇄적이었고 그리스 문명에 관심이 없었다. 그 결과 로마로 건너간 ‘브레인’들은 로마의 귀족 자녀들을 가르치며 돈을 벌었다.
이런 교육 혜택의 범위가 모든 시민 넓어진 시기는 바로 위에서 의료에 큰 변화를 일으킨 율리우스 카이사르 시대부터이다. 당시 꼭 그리스인이 아니더라도 그리스에 관심을 가지고 그리스에서 유학한 다양한 속주국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이 로마 시민권을 가지기 위해 로마로 왔고 이들이 다양한 학원을 만들거나 시민들의 개인 교사로 활동했다.
이런 교육의 발전은 체계적 교육과정을 만드는데 기여했다. 초등 교육(루드스 리테라리우스, 7세~11세), 중등 교육(그람마티키 스콜라, 12세~17세), 고등 교육(레토리스 스콜라, 17세 ~ 20세)을 구분했다. 초등 교육은 간단한 언어와 수리적 능력을 배웠고 중등 교육에서는 다양한 문학작품에 대한 탐구하여 교양을 높이는데 주력했다. 이후 군단에 들어갈든 고등 교육을 받든 결정하는 시기가 온다. 고등 교육은 변호사나 정치가와 같은 전문가를 양성이 목적이었다. 이런 고등 교육은 대학에서 이루어 진다.
개방이 무조건 좋은 것은 아니지만 받아들이고 어떻게 활용하는가?가 중요한 것 같다.
사실 초, 중, 고등교육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이런 체계가 고대시대에 잡혔다는 것은 사실 놀라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교육에 있어 평등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누구나 체계적인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이런 부분에 있어 서양이 동양보다 학문적 성과나 깊이가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예술이나 순수학문같은 경우에는 유럽으로 유학을 가는 경우가 많다.
그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옛날부터 잡혀진 체계와 이를 바탕으로한 교육, 그리고 결과 축적.
어릴 때, 왜 막연히 유학을 갈까?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또한, 지금도 막연히 서양의 학문적 깊이가 깊으니까 유학 가겠지. 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왜 서양이 학문적으로 좀 더 발달할 수 있었는지 알 것 같다.
이런 초등, 중등, 고등 교육은 전부 사립으로 운영되었고 단지 연구를 위한 대학(무세이온과 같은 곳)만이 국가에 의해 운영되었다. 하지만 이 역시 기독교가 지배하는 로마로 바뀌면서 공립으로 바뀌었다.
의아한 것은 로마가 경제적으로 쇠퇴하던 시기에 의료, 교육의 공영화가 시행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공영화에 기독교 정신이 침투하면서 ‘의문’을 가지고 연구하는 것에 대한 중요성이 퇴색되었다. ‘왜?’라는 의문이 이젠 그냥 ‘믿으면 된다’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공립으로 전환된 부분은 매우 좋은 일이다. 하지만... 탐구적 부분이 결핍된 의료와 교육은 아마...
앞으로의 발달에 큰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실제로 현재도 졍치와 종교는 분리되어 있다.
로마도 잘 분리시켜 왔지만... 결국 실패했다.
아마 이런 부분도 로마의 멸망에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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