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편은 로마의 철인황제라고 불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 대한 내용이다. 이 황제는 이상적인 세상에만 있는 현실을 실제로 로마에 적용한 유일한 황제라고 하는데… 어떤 인물일까?

로마인 이야기 11편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마르쿠스의 집안은 속주 출신이지만 마르쿠스가 태어났을 때에는 이미 엄청나게 부유한 최상류 층 귀족이 되어있었다. 마르쿠스의 엄마는 부유했지만 항상 검소한 생활을 했고 마르쿠스는 이를 그대로 배웠다.

마르쿠스는 중등 교육을 배울 때 그리스 철학에 푹 빠지게 되었다. 그래서 그리스 철학자들의 생활방식을 따라하기도 했다. 하지만 마르쿠스의 자질은 뛰어났고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이런 그에게 알렉산드로스, 트로시우스 아페르, 코르넬리우스 프론토 이렇게 세 명의 교수진을 붙였다.

알렉산드로스는 정통 그리스어 교육자였고 트로시우스 아페르는 정통 라틴어 교육자였으며 코르넬리우스 프론토는 토론을 가르쳤다. 이들은 통치자로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를 가르쳤다. 당시 마르쿠스는 황제 후보자는 아니었는데도 통치자의 행동에 관한 교육을 받았다는 것은 마르쿠스에겐 행운이었다. 왜냐하면 아일리우스 카이사르가 죽은 후 하드리아누스의 관심은 마르쿠스에게 온전히 쏠렸기 때문이다. 즉,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마르쿠스로 가는 징검다리 역할이었다.

마르쿠스가 가장 잘 따랐던 스승은 프론토였다. 이 프론토에게 자주 편지를 쓰고 철학적인 자신의 생각을 자주 전달했다. 마르쿠스는 치세 말기 로마 제국의 목표를 아래와 같이 말하고 있다.

법은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집행되고, 개인의 권리와 언론의 자유도 보장된다.
이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야말로 모든 백성의 자유를 보장하는 데 기반을 둔
군주정의 존재 이유다.

정말 선구적인 생각이다. 하지만 여기에 빠져있는 것은 어떻게 이를 달성하는냐?이다.

마르쿠스는 형이상학적인 생각만으로 정치를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즉, 아무런 경험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런 부분은 후에 그의 치세에 큰 어려움을 가져다 준다.

마르쿠스는 황제가 되기 전까지 안토니누스 피우스와 항상 함께 살았다. 왜 마르쿠스는 그 오랜 기간을 로마에만 틀어박혀 있었던 걸까?

안토니누스가 그를 속주로 보내 경험을 시키지 않더라도 마르쿠스 스스로가 속주로 가고 싶다고 이야기 할 수 있었을 텐데… 전혀 그러질 않았다. 여기서 내릴 수 있는 답은 너무 평화로웠기 때문이다. 안토니누스는 23년 간 로마에서만 통치를 했고 그 결과도 좋았다. 하지만 이런 평화는 결과적으로 로마 제국의 쇠퇴의 길이 된다. 그러면 생각해 볼 수 있다. 정말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치세는 진정으로 평화로운 치세였을까?

대부분의 연구진들은 로마의 쇠퇴는 오현제의 시대 이후라고 한다. 즉, 평화가 지속되었기에 쇠퇴의 시기로 접어든 것이 아닐까? 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즉, 너무 평화로운 시기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급변화된 세상에 적응하기 쉽지 않다. 이런 급변하는 시기의 시작은 바로 이 마르쿠스가 황제가 된 이후부터 시작된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라는 말이 생각난다.
보통 우리는 평화로운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평화는 정체를 의미하기도 한다.
즉, 적절한 평화와 적절한 위기가 필요한 것을 알 수 있었다.
내 인생을 돌이켜 보면 32년간 너무 평화로웠다. 특히 지난 10년.
그리고 약 1년간의 위기가 있었고... 지금 다시 평화를 되찾아 가는 중이다.
지난 10년 나는 끊임없이 발전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아니었다.
나는 우물안 개구리였고 그 안에서 발전한 것이다...
얻은 것이 없다고 하면 그것도 거짓말이지만... 잃은 것도 많은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적절한 변화가 필요한 것 같다. 변화를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부여하려고 노력해야 겠다.

안토니누스 피우스가 죽은 후 마르쿠스는 자신의 동생 루키우스와 함께 황제에 등극한다. 두 명의 황제가 로마를 통치하는 모습이다. 이것만 봐도 마르쿠스가 얼마나 철학적이고 이상적인 사람인지 알 수 있다. 다행인 것은 이 루키우스는 형의 말을 잘 따르는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마르쿠스가 황제에 등극하고 머지않아 기근과 홍수라는 문제를 떠안게 되었다. 이런 문제에 대처하는 동안 다시 파르티아가 아르메니아를 침공하는 문제가 발생했다. 속주 총독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위해 군대를 이끌고 가지만 패배하게 되고 속주는 자결하게 된다. 이 소식을 들은 마르쿠스는 죽은 속주 총독대신에 새로운 인재를 배치해야 했지만 중요한 것은 마르쿠스와 루키우스 이 둘 모두 전쟁 경험이 없다는 것이었다. 또한, 사기 또한 떨어져 있었다. 안토니누스 시대에는 전쟁이 없었기 때문에 누구를 어디에 배치해야 하고 어떻게 해야하는지… 마르쿠스와 루키우스는 알 방법이 없었다. 즉, 직접 부딪혀야 했다. 결국 루키우스 황제가 직접 전선에 가기로 한다.

루키우스는 시리아로 가는 동안 다양한 여행을 즐기며 떠났고 도착해서도 애인을 만들고 전선에서는 빠졌다. 하지만 스타티우스 프리쿠스라는 훌륭한 장수가 브리타니아에서 루키우스보다 먼저 도착했다. 이는 반격에 기회가 되었다. 이렇게 로마군은 파르티아 군대를 아르메니아에서 몰아내고 이제는 파르티아까지 쳐들어 갔다. 이 때, 아비디우스 카시우스라는 인물이 활약을 했고 파르티아를 다시 속주로 만들었다. 그렇게 마르쿠스와 루키우스는 개선식을 했다.

이 당시 로마 제국은 ‘레스 푸블리카(공동체 주의)’에서 ‘개인주의’화가 되어가고 있었다. 사실 로마는 중앙정부 직원들은 모두 무급이었고 봉사하는 역할이 된지 오래였으며 이렇게 무보수로 일하지만 고발당하면 벌까지 받는 시대였다. 이런 문제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가치는 ‘냉담, 무관심, 무기력’으로 점차 변하게 되었다. 또한, 당연히 평화로웠기 때문에 군무 담당자의 평가가 하락하기 시작했다. 이를 작가는 ‘평화의 대가’라고 표현했다.

평화의 대가... 정말 멋있는 말이다.
현 시대는 평화 속에 위기의 연속인 것 같다. 겉으론 평화로운 것 같지만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는 시대이다.
이런 변화의 시대에 앞서가기 위해 우리는 끊임없이 노력하고 적응한다.
변화를 모르면 도태된다. 그래서 책이 필요하다. 전부 경험할 수 없으니까.
변화를 모르면 도태된다. 그래서 역사가 필요하다. 온고지신이니까.
변화를 모르면 도태된다. 그래서 사람이 필요하다. 모든 분야를 잘 할 수 없으니까.

이 전쟁 후 바로… 평화를 되찾은 것이 아닌 페스트가 발병했다. 그리고 이런 시기와 함께 북방 야만족의 침입이 시작되었다.

안토니누스 피우스 치세 말기, 야만족이 로마의 속주가 되고 싶다고 요청해온 적이 있다. 하지만 그는 아무 쓸모도 없는 사람들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다. 왜 그들이 속주로 되고 싶다고 했을까? 바로… 먹을 것이 부족한 지역의 부족들이 점차 서쪽으로 이동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즉,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야만족의 속주화의 중요성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로마 제국의 방어선이 되어준다는 그 중요함을…

이렇게 발생한 게르마니아 전쟁에 의해 처음으로 로마의 방위선이 뚤렸고 이는 로마인에게 큰 충격이었다. 더 이상 로마도 평화롭지 않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수년간 야만족과의 전쟁을 치루고 그 사이에 일어난 ‘카시우스’를 포함한 다른 부족들의 반란도 진압하는 등 전쟁을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긴 시간을 투자했지만 뚜렷한 결과도 없이 8년이 흘렀다. 그렇게 제 2차 게르마니아 전쟁을 치루기 직전에 병의 악화로 죽었다.

로마가 침범당한 시기는 딱 2번이라고 생각한다.
한 번은 갈리아 인들에 의한 침범. 그리고 한니발 전쟁.
그 이후 로마가 타 민족에 두려움을 떠는 시대는 없었다. 하지만 이제 생겼다.
이 역시... '평화의 대가'다.
다행히 현 시대는 어느 분야든 끊임없이 연구가 지속되고 있다.
당연히 주가되는 분야가 있지만 언젠가는 눈에 띄지 않는 분야가 시대의 흐름이 될 수 있다.
이런 부분을 우리들은 간과하지만 국가를 운영하는 사람들은 간과하지 않는 것 같다.
그러니까 소수지만... 끊임없이 연구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몰라도 되는 것은 없다. 언제 그게 중요해 질지 모르니까.

쇠퇴의 시작인 콤모두스 황제. 사실 쇠퇴의 시작이라는 평가때문에 콤모두스에 대해 알기 전부터 싫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