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후 등극한 발레리아누스 황제는 최초로 페르시아에 포로가 되는 사태가 미증유의 국난이 발생한다. 그의 아들 갈리에누스가 단독 황제가 된다.

로마인 이야기 12편 - 갈리에누스 황제

####갈리에누스 황제(253년 ~ 268년)

황제가 포로가 됐다는 소식에 게르만 족의 침입이 더욱 심해졌기에 아버지를 구하러 갈 수 없었다. 그리고 포로가 된 로마 군인들 역시 노예가 되었다. 그들은 페르시아의 인프라 공사에 투입되었고 어김없이 로마 인프라의 위대함을 보여주었다.

갈리에누스는 수도에 거의 돌아오지 않고 제국의 서방에 계속 머물렀다. 문제가 있으면 바로 달려가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어떻게든 해결책을 찾으려고 발로 뛰어다닌 황제였다.

그가 로마인의 비로마화의 많은 예를 보여주었지만...
나는 리더의 책임감이 강한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위급한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발로 뛰며 해결하려는 그의 모습은 본 받을만 하다.

이 때와 겹쳐 갈리아 지역에 반란이 일어나 갈리아 제국이 만들어 진다. 하지만 이 갈리아 제국의 사람들 모두 로마인이 된 상태였고 지금 당장 손을 쓸 방법이 없었기에 갈리에누스 황제는 이들이 라인 강 방위를 신경써줄 것으로 믿고 방치하고 도나우 강 방위에 집중하기로 한다. 이 방치는 큰 불만을 샀지만 결과적으로 아주 잘 한 일이였다.

또한 팔미라 여왕 제노비아가 이집트를 포함하여 소아시아 동부 카파도키아까지 세력을 확장했고 로마에 반기를 들었다. 그 결과 로마는 삼분화 되었다. 하지만 갈리에누스는 이 상황을 막을 수 없었다.

갈리에누스는 원로원과 군대를 분리시키는 법률을 입안하여 성립시켰다. 즉, 원로원 의원은 이제 더이상 로마군 장교급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로마인의 비로마화를 보여주는 예가 되었다. 그 이유는 이 법률이 군사도 아는 정치가, 정치도 아는 군인을 낳지 못하는 상황으로 끌고 갔기 때문이다.

로마인의 비로마화의 다른 예는 바로 기병부대의 부활이었다. 갈리에누스는 조직을 기병부대를 주력부대로 바꾸었다. 수많은 보병이 소수파인 기병에게 밀리게 되었다. 게르만 체제를 대처하기 위한 방식이라지만 기병가 보병은 함께 행동하기가 힘들다. 다행히 게르만 체제에는 제대로 대응할 수 있었지만 이제 공격으로 수비하는 것이 아닌 공격받은 뒤 비로서 이기는 형태가 되었다.

공격은 최상의 방어라는 방식은 택해온 로마가 구축한 방위선은 이제 의미가 없어졌으며 그 근처 주민들은 침입할 수 없는 고지대에 성벽을 쌓아 지내기 시작했다.

이렇게 군단비는 증가하고 로마는 분리된 상태를 못견딘 로마는 쿠데타를 일으키고 갈리에누스 황제를 살해하게 된다. 그 이후 등극한 황제는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다. 그는 고트족을 상대로 싸워서 이기며 현 상황을 제대로 타개할 것처럼 보였지만 전염병으로 인해 2년 후에 죽고 만다.

이 당시 원로원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까?
시기 적절한 판단이 중요한 시점에... 탁상공론만 했을까?
이런 탁상공론으로 어떤 문제의 해결이 지연되는 현상을 만들지 않았을까?
그래서 갈리에누스는 원로원과 군인을 분리시킨 것이 아닐까?
후대의 우리가 봤을 때는 바보같은 행동이라고 판단되는 것도...
이 당시에는 정말 최선의 선택이 아니었을까?
제대로 된 의견 일치를 보지 못하는 로마의 현 상황에서...
과연 리더라면 이 결정이 최선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