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두정치에서 물러나서 이제 새로운 정제, 부제의 시기. 하지만 이 사두정치도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은퇴한 후 얼마가지 못하게 된다.

로마인 이야기 13편 - 콘스탄티누스 황제(서기 306년 ~ 337년)

이 붕괴는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가 죽으면서 시작되었다. 부제였던 세베루스가 정제로 승격되고 콘스탄티누스는 부제에 취임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런 상태는 석 달도 채 가지 않았다.

막센티우스가 제위 계승 코스에서 또다시 제외되어 그 불만을 터뜨린 것이다. 아버지 막시미아누스가 은퇴 후 그 제위를 계승하지 못했고 이번에도 제위를 계승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도 황제에 취임하고 아버지도 제위에 복귀시켰다. 즉, 서방에는 4명의 황제가 존재하게 되었다.

서방의 정제가 된 세베루스는 막센티우스를 토벌하려 했지만 당시 그가 이끌고 있던 군단은 이전부터 막시미아누스와 동거동락했기에 토벌자체가 불가능했고 결국 세베루스는 자결의 형태로 살해당했다.

이에 갈리레우스가 직접 토벌하러 나섰지만 세베루스에게 협력하지 않은 도시를 모조리 습격하여 약탈하고 불태우는 방식을 취했다. 그 결과 이탈리아 반도 전체가 그에게 등을 돌렸고 토벌 불가상태가 되어 다시 발칸 지방으로 돌아갔다. 이런 실패는 그의 지위마저 위협할 우려가 있었다.

이런 사태를 막기위해 수뇌회담이 열렸다. 막시미아누스는 디오클레티아누스를 황제로 복귀시키려고 노력했지만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완고했고 막시미아누스 역시 설복당하여 황제에서 물러났다. 또한, 세베루스의 자리를 리키니우스로 대체하는 것으로 이 회담은 끝이 났다.

이 결정은 막시미누스 다이아와 막센티우스 둘의 불만을 다시 증폭시키게 되었다. 막시미누스 다이아는 부제로 3년간 어려운 임무를 수행했음에도 정제가 되지 못했던 것이 불만의 원인이었다.

막시미아누스는 회담 후 결정난 내용을 아들 막센티우스에게 알렸고 막센티우스는 그 결정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위험을 느낀 막시미아누스는 몰래 콘스탄티누스가 있는 곳으로 가서 자신의 딸 파우스타와 결혼 제의를 한다. 콘스탄티누스는 그 제의를 승낙했고 그 후 라인 강 방위를 위해 출전했다. 콘스탄티누스가 머물렀던 트리어에 계속 지내고 있던 막시미아누스는 그가 없는 틈을 타서 쿠데타를 기도했다. 하지만 콘스탄티누스는 예상보다 빠르게 귀환했고 그 쿠데타는 실패했고 결국 죽게 된다.

311년 갈레리우스가 불치병으로 죽게된다. 이로써 정제 한 사람과 부제 두 사람 그리고 공적이 된 막센티우스의 싸움이 되었다. 리키니우스와 콘스탄티누스는 동맹을 맺고 콘스탄티누스가 막센티우스 타도에 앞장서게 된다. 이 동맹에서 콘스탄티누스의 이복누이 콘스탄티아가 리키니우스와 결혼했다.

콘스탄티누스는 알프스를 넘어 토리노 근처, 베로나에서 회전을 벌였고 승리했다. 이후 역사를 창조한 전투라고 불리는 밀비우스 다리 전투가 일어났다. 사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이수스 대전, 스키피오의 자마 회전, 카이사르의 알레시아 공방전에 비하면 이 전투는 별 볼일 없는 전투라는 의견이 있다. 하지만 이 전투 이후에 기독교가 세계를 향해 첫 발자국을 찍게 되었기에 역사를 창조한 전투가 되었다.

이 전투는 사실 놀라운 전법이라 기라성 같은 인물이 등장하지는 않는다. 그냥 조잡하게 싸우고 결국 콘스탄티누스가 이긴 전투이다. 이 전투의 승리했고 막센티우스는 밀비우스 다리 어디선가 죽었고 37세에 콘스탄티누스는 서방의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

우리는 자주 재벌 형제자매들의 싸움을 본다.
도대체 무엇때문에...? 자존심...? 나는 이렇게까지 밖에 생각을 못한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고 한다.
정제, 부제라는 이 한 끝차이가 그만큼 그들에게 중요했던 것일까? 얼마나 중요했을까?
사람은 누구나 태어났으면 무엇인가 이루고 싶어한다.라는 입장에서 보면 이해가 된다.
하지만 또 다르게 생각하면 그게 얼마나 차이난다고 그렇게까지...?라는 생각을 한다.
정답은 없다. 그냥 사람의 가치관 차이가 아닐까...?

이 승리로 로마에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이 드러섰다. 이 개선문은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마르쿠스 아루렐리우스 황제 때 조각된 조각상들을 옮겨붙여 장식된 개선문이다. 이는 약 200년 사이에 로마인의 조형 능력의 차이를 보여준다.

정말 얼마나 로마의 상태가 안 좋으면 이렇게 밖에 못할까?
너무 안타깝다. 실제로 보진 못햇지만 사진으로만 봐도 퀄리티 너무 차이가 난다.
그리고 여기저기서 조각상을 때서 붙였다니... 안타깝다.

이제 남은 사람은 세 사람. 이 중 동맹을 맺지 않은 사람은 막시미누스 다이아였다. 그는 여기에 위기의식을 느껴 먼저 리키니우스가 다스리는 소아시아로 쳐들어갔지만 결국 패배했고 죽었다. 이로써 콘스탄티누스, 리키니우스 이 두 사람만이 남게 되었다.

이 둘은 곧 밀라노 칙령을 발표한다. 이는 기독교를 공인한 칙령이다. 즉, 기독교 신앙을 어떤 조건없이 완전히 인정받게 되었다. 기독교가 이제 다른 로마 신들과 완전히 동등한 위치가 된 것이다.

313년의 양두정치는 285년의 양두정치와 전혀 달랐다. 이제 동등한 입장에서의 정제였기 때문이다. 2년 후 이 둘의 관계는 파탄났고 결국 7년 동안 3번의 전쟁이 일어난다. 이 전쟁은 국토를 황폐하게 만들게 만들었다.

첫 전투는 키발라에라는 도시에서 벌어졌는데 라인 방위선을 지키는 갈리아 병사와 도나우 방위선을 지키는 발칸 병사가 정면으로 격돌했다. 서로 전투 경험이 많았고 이 들의 싸움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이런 전투에서는 지휘관이 능력이 중요하다. 즉, 콘스탄티누스가 당연히 이겼다. 두 번째 전투는 트라키아와 그 남쪽의 마케도니아를 가르는 산악지대에서 벌어졌는데 이 역시 콘스탄티누스의 승리로 마무리 된다. 세 번째 전쟁은 약 7년 후 벌어지는데 그 이유는 콘스탄티누스의 이복누이 콘스탄티아가 개입했기 때문이다.

어쩄든 이제 리키니우스는 콘스탄티누스의 경쟁자가 아니었다. 강화 이후에 콘스탄티누스는 북방 야만족을 물리치는데 시간을 보냈다. 라인 강과 도나우 강 양쪽에서의 침입이었지만 다행히 콘스탄티누스에게는 듬직한 아들 크리스푸스가 있었다. 그는 막시미아누스의 딸과 결혼하기 전에 결혼한 사람의 아들이었다. 그에게 라인 강 방위를 맡겼고 콘스탄티누스 자신은 도나우 강으로 향했다. 7년 간의 전투 결과 다행히 북방 야만족으로 부터의 침입에서 벗어났고 그는 바로 리키니우스에게 눈을 돌린다.

콘스탄티누스는 터키의 주요 도시인 에디르네 근처에서 일어난 세 번째 전투에서 승리했고 리키니우스는 지금의 이스탄불에 틀어박히게 되었다. 이스탄불(비잔티움)은 천연의 요새여서 해전, 지상전 모두 필요했다. 크리스푸스가 해전을 지휘했고 크게 승리했고 물자 수송이 끊긴 리키니우스는 결국 니코메디아까지 달아났다.

콘스탄티누스는 쉬지않고 공격하려 했으나 콘스탄티아가 또 개입하여 다행히 전쟁없이 리키니우스를 항복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콘스탄티누스는 1년 후 반란을 일으키려고 했다는 명목으로 리키니우스를 죽였다. 이렇게 그는 유일한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 참고로 콘스탄티누스는 자신의 아들 크리스푸스 역시 파우스타와의 불륜이라는 명목으로 죽였다.

그는 단일 황제가 된 후 수도를 비잔티움으로 옮겼다. 불만을 최소화하기 위해 로마의 것들을 그대로 남겨두고 새 수도에 같은 것을 만들었다. 그 중 하나가 원로원이다. 로마의 원로원과 체계를 그대로 남겨두고 새 수도에 원로원을 만들었다. 하지만 이 원로원은 아무른 기능이 없는 무늬만 가진 원로원이었다.

군대 역시 바뀌었다. 이제 방위선은 군인이 해당 지역에 가정을 이루고 살면서 방위하는 형식이 되었다. 즉, 파트타임 군인이었다. 이제 안전보장은 없어졌다. 쳐들어오면 막는 방식만 남았을 뿐이다.

콘스탄티누스는 기존의 은본위제에서 금본위제로 바꾸었다. 통화제도에 안정을 꾀하긴 했지만 큰 빈부격차를 만들었다. 왜냐하면 금화의 가치를 확립하는데만 성공했고 은화와 동화는 가치변동제로 방치했기 때문이다. 세금은 금화로 내야되었기에 은화, 동화로 거래한 사람들이 세금낼 때 이 은화, 동화를 금화로 바꾸어야 한다. 이런 매커니즘이 빈부격차를 심화시키는 역할을 한 것이다. 또한, 관료들의 봉급은 금화로 받았다. 즉, 이들은 혜택받는 사람이 된 것이다.

콘스탄티누스는 밀라노 칙령 이후 기독교에 많은 혜택을 주기 시작했다. 몰수당한 교회를 경매를 통해 정부에서 회수한 후 기독교에게 반환해주거나 성직자에게는 어떠한 공무도 면제시켜 주는 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런 혜택은 엄청난 세금에 부담을 가지는 사람들이나 로마 신들에게 실망한 사람들에게 큰 유혹이었고 많은 사람들이 성직자가 되려고 했다.

왜 콘스탄티누스는 기독교에게 많은 혜택을 주었을까? 로마는 원래 세습과 1인 군주정에 익숙하지 않다. 즉, 신에게 받은 권력이라는 느낌을 주고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고 세습을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콘스탄티누스는 페르시아의 군사적 움직임을 막으러 출전했다. 당시 62세였던 그는 노쇠했기에 전쟁터로 가는 도중 죽었다.

너무 갑작스러운 개혁은 큰 변화를 가져온다.
이 변화에는 항상 장단점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 같다.
지금까지 신이라는 존재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별로 없다.
하지만 이번 책을 읽으면서 신에 대해서 조금 생각해 볼 시간을 가졌다.
나는 무교지만 뭔가 정말 간절할 때 두 손을 모으고 존재하지 않는 무엇인가에 빈다.
또, 제발! 이라는 말을 외치며 눈을 감을 때도 있다.
무의식적으로 이렇게 눈에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에 호소하는 것은 사람의 본능일까?
결과는 5:5다. 제발이 통할 때와 안 통할 때.
통하든 통하지 않든 상관없이 2가지 경우가 있는 것 같다.
아싸~(짜증나네~) --> 감정적.
신 덕분이다. 감사하다.(신이 시련을 주시네.) --> 위안
즉, 내 생각은 감정에 충실한 사람이 되는 것을 조금 막아주는 느낌이다.
감정이 나를 잡아먹어 통제를 못하는 상황을 아마 막아주는 역할이 아닐까?
단순하게 이렇게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