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편은 율리아누스가 황제가 된 후의 이야기이다. 열악한 환경에서 자라난 율리아누스는 어떻게 콘스탄티우스를 대신해 황제가 될 수 있었을까?

로마인 이야기 14편 - 율리아누스 황제(서기 361년 ~ 363년)

사산조 페르시아는 다시 로마로 쳐들어왔다. 콘스탄티우스 황제는 직접 출전하지 않고 사비니아누스를 사령관으로 보냈다. 하지만 그는 단지 관료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고있던 사람이었고 오리엔트에 대해 아는 것이 전무했다. 막상 오리엔트에서 실전을 지휘해본 경험도 풍부한 우르시키누스는 부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사비니아누스는 우르시키누스가 제안하는 전략을 거절하고 자신의 뜻대로 군사를 움직이다 결국 아미다를 빼앗기고 만다. 아미다를 막고 있던 암미아누스와 병사들은 원군이 올 것이라고 확신하고 10만명의 페르시아 군을 고작 2만명으로 상대하고 있었다. 73일간 버텼지만 결국 함락하게 된다.

이 소식을 들은 콘스탄티우스 황제는 본인이 직접 출정하기로 결정한다. 이 때 율리아누스에게 정예를 차출하여 보내라고 했다. 율리아누스는 고작 1만 3천명의 병사로 수많은 전투를 치뤄왔고 라인 강을 방위해왔다. 하지만 정예를 차출하게 되면 그에게 남는 병사는 거의 없어진다는 것을 의미했다. 또한, 이 병사들은 율리아누스와 생사고락한 병사들이라 차출되는 것을 꺼려했고 거부했다. 한달 후, 갑자기 병사들이 율리아누스를 황제로 옹립한다는 말인 ‘율리아누스, 아우구스투스!’를 외치기 시작했다.

이렇게 일이 커진 이상 율리아누스는 콘스탄티누스에게 자신을 서방의 정제로 인정해 달라고 편지를 썼다. 당연히 이전의 이두정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낮은 위치라는 것을 인정하겠다는 내용도 포함했다. 하지만 콘스탄티우스는 이에 대한 답장도 없이 율리아누스가 있는 곳으로 출정하기로 결정했다. 율리아누스는 콘스탄티우스가 온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서 재빨리 움직였다. 그러던 중 콘스탄티우스가 갑자기 병으로 죽었다는 소식과 함께 율리아누스 자신을 후계자로 지명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이렇게 율리아누스는 황제가 되었다.

나는 책을 읽으면서 율리아누스가 결국 죽는 줄 알았다.
하지만 황제가 되는 것에 스스로 매우 기뻤다.
그라면 다시 예전의 로마시대로 되돌릴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로마가 가장 부흥했던 시기. 다시 그 시기를 나도 상상하고 싶었던 것일까?

율리아누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들어가자마자 황궁을 개혁하기 시작했다. 너무 비대해진 관료 기구를 구조조정하여 간소화 시켰고 환관 집단을 모두 해임하여 황궁에서 쫓아냈다. 또한, 국민이 종교를 밀라노 칙령 상태로 되돌렸다. 즉, 기독교 우대 정책이 아닌 누구에게나 자유롭게 신을 믿을 권리를 준다는 상태로 되돌린 것이다. 그는 시대의 흐름을 거역하고 있었다.

그는 지금까지 국고로 교회를 지어서 기증하거나 활동비를 기부하는 것을 전부 폐지했고 비과세 대상으로 삼았던 교회의 자산에 다시 세금을 부과하기 시작했다. 또한, 기독교 우대 정책에 의해 무너져가던 신전들을 재건하기로 결정했고 공식 제의도 부활시켰다. 이렇게 그는 기독교에 선전포고를 했고 배교자가 되었다.

그는 복지사업, 공공사업에도 열중했고 기독교가 이 부분에 의해 커진 것을 알고는 지방자치에 힘을 주려고 했다. 하지만 이미 로마는 사회 환원이라는 개념도 잊어버렸고 과거의 것이 되어버려 그가 죽은 후에 다시 흐지부지 되었다.

안티오키아는 당시 매우 큰 도시 중 하나였다. 이 도시에 흉년이 들어 밀이 전부 없어지는 상황이 발생했다. 이 부분에 투기가 존재했으며 아직 이 사실을 모른 율리아누스는 주민들에게 근검절약을 강조하며 밀을 이집트에서 대량으로 사들여 풀었다. 하지만 이 밀이 제대로 풀리지 않은 것을 알게된 그는 당장 투기한 원로원 200명을 감옥에 가두었고 그들이 밀을 푼 후 풀어주었다. 이 사건 이후로 그는 원로원들의 반감을 크게 사게 된다.

안티오키아 근처에 있던 다프네라는 도시에 참배를 간 율리아누스는 기독교 순교자의 무덤때문에 아폴론 신전에 아무도 참배를 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이 무덤을 다른 곳으로 이장명령을 내렸고 아폴론 신전을 재건하는 공사를 시행했다. 이 공사가 끝날 때쯤 신전에 화재가 발생하여 전부 타버리게 되었다. 이에 격분한 율리아누스는 안티오키아의 기독교회를 모조리 폐쇄시켰고 중간층과 하층계급의 반감까지 사게 되었다.

나는 그가 행하는 정치를 보고 정말 기뻤다.
이미 당시 로마는 많이 변했지만 다시 부흥할 기회를 가졌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가 실시한 정책은 대부분 합리적이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정치가 종교에 의해 지배되는 세상은 옳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한, 수많은 사람이 함께 살아가는 세상에 평등이 존재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숨 쉴 구멍은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상적일 수는 있지만 적어도 기본적인 욕구는 충족될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이렇게 안티오키아 시민들과 사이가 나빠지는 사이 페르시아 전쟁이 일어났고 그는 출정을 했다. 그 때 그는 이교, 기독교가 반반인 군대를 이끌었다. 많은 병력을 가지고 출정했지만 오리엔트에 대해 잘 모르는 그였으며 병사들도 자신과 동거동락한 병사보다 새로운 병사들이 많았다. 전쟁은 이기지만 많은 실수가 동반되었고 피해도 컸기에 병사들의 불만은 커져갔다.

그러던 중 기습해 온 페르시아 군을 막기 위해 싸우던 중 어디선가 날라온 창이 그의 배를 찔렀다. 전투에선 이겼지만 그는 중태였고 하루를 넘기지 못하고 죽었다. 그의 시신은 타르수스에 매장되었지만 전쟁 중이었기 때문에 어디에도 묻혔는지 알 수 없게 되었다.

그가 죽은 후 기독교를 믿는 요비아누스가 황제에 올랐고 그는 페르시아와 강화를 맺었고 율리아누스가 펼친 정책 모두를 폐지시켰다. 이렇게 율리아누스가 노력했던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었다. 7개월 후 요비아누스는 자연사로 죽게되었고 북방 야만족 출신인 발렌티아누스가 그 뒤를 이었다.

율리아누스의 치세가 19개월이 아닌 19년이었으면 어땠을까? 그랬으면 시대의 흐름을 바꿀 수 있지 않았을까? 유일하게 그 당시 일신교의 폐해를 깨달은 사람이 아니었을까?

정말 그가 19년 동안 치세를 펼쳤으면 어땠을까?
율리아누스가 죽었을 때 카이사르가 암살당했을 때 만큼 아쉬움이 컸다.
그가 죽으면서, 죽기전에 이야기 한 것들을 읽을 때마다 합리적이고...
이 당시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그가 존경스럽다.
아마 이상적이었고 철학적인 부분이 있지만 그래도 훌륭한 인물이...빠르게 요절한 것이 너무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