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개월의 치세 후 죽은 율리아누스… 이후 로마는 완전히 기독교 세상이 되어버린다.

로마인 이야기 14편 - 암브로시우스 주교(서기 374년 ~ 397년)

갑자기 뜬금없이 황제가 아닌 암브로시우스 주교라는 이름으로 시작해서 놀랐다.
드디어 황제가 사라진 것인가? 라고 생각했을 정도이다.
황제보다 그가 로마에 끼친 영향이 엄청나게 컸다는 것을 나타낸다는 것을 곧 알게 되었지만...

발렌티아누스는 황제가 된 후 한달 후 자신의 친동생 발렌스를 공동 황제로 임명하며 동방을 맡겼다. 발렌티아누스가 치세를 펼친지 10년. 야만족의 침입은 점점 심해지고 있었고 그는 10년 동안 방위선이 무너질 때마다 달려가서 복구했다. 그래도 그는 무장으로서 훌륭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렇게 10년이 지나고 발렌티아누스는 죽고 발렌스는 그대로 황제가 되었고 발렌티아누스의 맏아들 그라티아누스는 제국의 서방을 둘째 4살된 발렌티아누스 2세는 서방의 일부 이탈리아를 맡겼다.

그라티아누스는 나이가 어렸지만 라인강 부근의 야만족과의 전투에서 상당한 성과를 올리고 있었다. 문제는 도나우강 근처의 고트족의 침입이었고 발렌스는 조카에게 뒤지기 싫었는지 조카가 도우러 온다는 소식을 무시하고 하드리아노폴리스 근처에서 전투를 했으며 크게 패한 것은 물론 발렌스 역시 전사했다. 이로 인해 동방과 서방이 야만족에 의해 분리되어 버렸다.

발렌스 뒤를 이은 것은 발렌티아누스 밑에서 신임을 받던 무장의 아들 테오도시우스였다. 그의 아버지는 신임을 받았지만 행정모략에 발렌티아누스에게 처형당하게 된다. 하지만 그는 그라티아누스의 부름을 받고 황제가 되었고 원래 있던 처와 이혼하고 황제의 누이동생과 결혼했다. 이 때 테오도시우스는 아버지의 명예회복만을 조건으로 걸었다고 한다.

그라티아누스는 테오도시우스에게 서방의 전권을 부여했고 무조건 협력도 약속했다. 그래서 그는 강압적으로 병사들을 모았다. 즉, 징집이였다. 그리고 당연히 불만도 있었고 충돌도 있었지만 큰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만큼 엄격했다.

도나우강 근처에서 고트족을 상대하던 그는 페르시아가 다시 쳐들어올 낌새를 느끼게 되었다. 양쪽으로 군대가 분산되면 큰일이기에 고트족에게 로마로 정착하여 살게 해주었다. 즉, 야만족을 이주시키는 정책을 펼친 것이다. 하지만 이는 쉽지 않았다. 훈족이 서쪽으로 밀고 들어왔기에 서쪽의 야만족들은 로마제국을 넘을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고 그 숫자가 수십만 명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수십만 명의 인구가 정착할 때는 기존 로마인들과의 충돌은 당연했으며 그들은 무기 또한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 기존 로마인들은 고트족에게 많이 유린당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그래도 고트족의 일부를 로마군으로 편입시킬 수는 있었고 병력 보강의 이점은 있었다. 이 병력 보강으로 로마군은 이제 야만족화 되는 흐름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지금도 이민자들에 대한 각 국가들의 정책이 큰 이슈이다.
프랑스는 이민자에게 관대하여 다 받아들였지만 언제부턴가 그 고름이 터지고 있다.
프랑스의 이민자 수의 비율이 전체의 8%인데도 문제가 발생하는데...
당시 도나우 지역의 인구수 대비 수십만 명의 이민자면... 문제는 당연히 발생할 수 밖에 없다.
게다가 당시에는 전쟁이 수시로 일어났기에... 더더욱 문제는 클 수밖에 없다.
과거의 로마 이민 정책을 고민하면서 현재의 이민 정책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아야 겠다.

암브로시우스는 삼위일체파와 아리우스파 사이의 충돌 사이에 등장한 인물이었다. 그는 수도장관의 아들로 리구리아주와 아이밀리아주의 장관이었다. 삼위일체파는 영리하고 자신들을 지켜줄 사람이 필요했고 그 적임자가 암브로시우스라 판단하고 주교라는 자리에 오르라고 권하게 된다. 그는 처음에는 거절했지만 결국엔 승낙하게 되고 일주일만에 주교라는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사실 이 부분을 보면서 종교와 그 종교 내의 사람들은 다르다는 것을 또 한번 알게되었다.
그들은 신을 믿으며 신의 은총을 받길 바란다. 하지만 행동은 전혀 아닌 사람이 많다는 것.
종교도 결국 조직이라는 것. 사람이 많이 모인 조직은 역시 깨끗하기 어렵다는 것.
하지만 그 누구도 건드려 보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
나 역시 용기도 없고 잘 알지도 못하며 크게 관심이 없기에...
당연히 시도해 볼 생각도 없지만...
파고 파면 아마 정말 다양한 문제들을 끄집어 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는 먼저 모든 사유재산을 기독교에 기부했다. 이 사건으로 밀라노의 모든 기독교인들이 암브로시우스 밑으로 뭉쳤다. 당시 밀라노 주교는 황제와 자주 만날 수 있었기에 다른 주교구보다 신도수는 적지만 영향력이 컸다.

그는 높은 교양과 명석한 두뇌, 세련된 말을 구사할 수 있었으며 필력도 좋았다. 또한 그라티아누스와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기독교에 매우 우호적이었다. 두 황제는 그를 자주 찾았고 외교사절까지 부탁할 정도였으며 암브로시우스는 이 두 황제를 잘 이용하기 시작한다.

암브로시우스는 배후에서 두 황제를 이용하여 이단, 이교배척을 시작한다. 먼저 테오도시우스 이단배척으로 15가지 칙령을 내세운다. 이후 그라티아누스는 이교배척으로 최고제사장 자리를 거부했고 이로 인해 1135년만에 로마 포르노 작은 신전에 있던 성스러운 불이 꺼지게 되었다. 또한, 신전 유지비로 충단한 모든 재원도 몰수했으며 모든 신전을 폐쇄했다. 마지막으로 원로원 회의장 앞에 있던 승리의 여신상을 철거했다.

383년 그라티아누스는 반란군 막시무스에 의해 죽고 392년 발렌티아누스 2세 역시 죽게된다. 이렇게 테오도시우스는 로마를 다스리는 단독황제가 되었다.

당시 아직 이교의 힘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기에 심마쿠스라는 인물은 테오도시우스 황제에게 현재 시행되는 이교배척을 반대하는 편지를 보냈고 암브로시우스 역시 이에 뒤지지 않고 반박하는 편지를 보냈다.

결과는 당연히 암브로시우스의 승리였다.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기독교에 이미 세례도 받았고 자신이 신의 은총을 받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후 공식 제의, 사적인 제의가 모두 금지되었다. 이렇게 기존 로마의 신들은 무법자가 되었고 이 무법자들의 신전은 하나씩 파괴되었다. 이렇게 옛 그리스, 로마 조각상부터 신전들은 파괴되었다. 기독교인들에겐 더이상 이것이 예술적으로 뛰어난 가치가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가끔씩 온전한 형태의 조각상들이 발굴되곤 한다. 아마 누군가가 이런 조각상들의 예술적 가치를 알고 몰래 숨겨둔 것이 아닐까?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단독황제가 된 후에 모든 것을 공정하고 공평하게 처리하려고 노력했고 나름 황제의 권력을 넘어서려는 기독교와의 팽팽한 신경전을 가졌지만 두 사건으로 인해 굴복하고 만다.

첫 사건은 유대교와 기독교간 분란에서 유대교의 편을 들어준 일이었다. 황제입장에서는 공정한 판단이었지만 기독교인들은 이에 크게 항의했다. 하지만 황제는 그 결정을 철회하지 않았다. 이 사건이 일어나고 얼마 후 황제가 밀라노에 가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 생겼고 밀라노 주교는 황제에게 신에게 받은 은혜를 잊었다고 호되게 꾸짖었다. 이에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비기독교인들은 로마법의 보호를 받지 못한다는 칙령을 넣었다.

두번째 사건은 민중폭도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많은 시민의 희생이 일어났다. 이 때 암브로시우스는 황제에게 과한 진압이었고 책임을 지라고 항의문을 보냈고 황제는 이를 무시했다. 그러자 암브로시우스는 황제의 교회 출입을 금지시켰다. 8개월 간 테오도시우스는 저항했지만 결국 굴복하고 기독교회에서 공식 참회를 치뤄야 했다. 카노사의 굴욕가 비슷한 상황이 이미 벌어진 것이다.

즉, 황제는 신이 인정했기에 권력을 가진 것이며 주교는 신의 뜻을 전하는 사람이기에 황제라도 거부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 사건들이다.

교육이나 암시가 정말 무섭다는 것을 느꼈다.
다 큰 어른도 이렇게 천천히 그리고 꾸준히 어딘가에 물들 수 있으며...
이렇게 한 번 물들면 벗어나기 쉽지 않다는 것도 느꼈다.
자신이 직접 경험하고 황제에 오르는 과정들이 모두 신이 부여했기 때문이라는 연결.
그 연결을 믿는 테오도시우스.
당연히 그 내막에는 환경적인 영향, 사람의 영향 등이 있었겠지만...
무장의 아들로 태어나 책과는 거리가 멀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암브로시우스는 14년간 주교로 있으면서 기독교회의 기반이 되는 대부분의 것들을 조직했다. 기존에 개별적으로 분산되어 있는 것들이 그의 손만 거치면 체계가 잡히고 조직되었던 것이다. 그만큼 그는 뛰어났다고 할 수 있다.

암브로시우스는 지금 표현을 따르면 금손이라 할 수 있다.
그가 건드리는 것은 새롭게 탈바꿈하니까.
당시의 시대적 흐름을 잘 타고 났다고 할 수도 있지만...
그가 큰 조직의 기반을 조직했다는 것을 보면 그의 능력은 인정할 만하다.
뛰어난 통찰도 가졌고 어떻게 사람을 활용해야 하는지도 알았던 것 같다.
부유한 가문으로 태어나 어릴 적부터 교육을 받았고, 정치에도 참여했기에
기독교라는 큰 조직을 체계화 시킬 수 있었지 않았을까? 라고 생각해 본다.
결국 다양한 경험과 끊임없는 공부가 어느 환경이든 중요한 것 같다.
왜냐하면 우리가 처하는 새로운 것에는 항상 사람이 포함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테오토시우스는 죽어서 대제라고 불리게 되고 로마는 두 아들 아르카디우스와 호노리우스에게 각각 로마의 동방과 서방을 다스리게 하였다. 이 분할은 정말로 로마가 동과 서로 분할되는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