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인 이야기를 모두 읽고 나는 로마 멸망 이후의 역사가 궁금해졌다. 그래서 찾아보던 중 동저자의 책은 로마 멸망 이후의 지중해 세계를 알게 되었고 읽었다.

서로마가 멸망 후 비잔티움 제국(동로마 제국)을 비롯하여 다양한 국가로 분열된 상태가 되었다. 이 분열된 국가들은 야만족들의 침입을 막는데 온 힘을 쏟고 있었고 비잔티움 제국은 점점 그 세력이 줄어들고 있었다. 그 때 이슬람제국이 영토를 넓혀가기 시작했다. 이슬람 제국은 순식간에 북아프리카, 이베리아 반도, 시리아 등을 점령했고 이슬람 집이라는 이슬람화를 시작하기 시작했다.

이 이슬람교는 세금이 없었다. 단지, 세금이라면 기부금이라는 명목으로 내는 것이 다였으며 개종하지 않은 이도교에게는 지즈야라는 재산세를 부과했다. 이슬람교는 완벽히 점령한 영토의 사람들을 이슬람화하지 않고 무작정 세력을 넓혀 내분도 잦았다.

북아프리카 이슬람교도들은 사라센인이라고 불렸고 해적질을 하기 시작했다. 이들이 해적질을 하게 된 이유는 몇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먼저, 다른 영토를 이슬람화 하는 것이 그들의 목표라는 점. 그들은 농사를 짓고 교역을 하는 것보다 검과 코란을 들고 전쟁하는 것에 더 능숙숙했다는 점. 원이슬람교도는 전쟁에서 이기면 전리품을 취할 수 있었지만 신이슬람교도는 취할 수 없었기에 이 두 그룹의 화홥을 위한 방법은 해적질이였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이렇게 사라센인들의 해적질은 날로 갈 수록 잦아지며, 산업화가 되었다. 이렇게 시칠리아가 점령되고 이탈리아, 남프랑스는 엄청난 피해를 입게 된다. 노략질로 젊은 남녀들이 포로가 되었고 그들은 노예 및 첩이 되었으며 노예 수용소라 불리는 목욕장이라는 곳에 감금되었다.

시칠리아는 이슬람교와 기독교 서로를 인정하여 두 종교가 함께 존재하는 현상이 일어났다. 그 이유는 이슬람교도들의 수가 기독교도들의 수보다 월등히 적었고 시칠리아를 운영하기 위해서는 지즈야를 거둬들여야 했기에 막무가내로 이슬람화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슬람교도들이 1등 시민, 기독교도들은 2등 시민으로 이슬람교도 사람들이 지나가면 길을 비키는 등의 예를 갖추어야 했다. 하지만 워낙 이슬람교도들이 적었기에 크게 불편함이 없었다.

이렇게 약 10세기~12세기 사이에 해적의 횡포에 못견딘 교황 및 여러 국가들은 힘을 합쳐 싸워보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분열된 국가들, 야만족 방어로 힘도 약해졌고 이전과 같은 협력은 볼 수 없었다. 교황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고 살해당한 교황도 한둘이 아니었다.

이런 해적질은 노르만인의 등장으로 큰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노르만인은 수백명의 인원으로 시칠리아를 탈환했고 이후 십자군 전쟁을 일으키며 지중해를 다시 안전지대로 만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전히 소규모 해적질은 지속됐고 19세기까지 목욕장에 감금된 노예들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조금씩 안정화 되자 목욕장에 감금된 노예들을 되사서 데려오는 구출수도회, 구출기사단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 두 집단은 오랜기간 수백번의 구출을 수행했으며 매 회 적게는 수십명에서 많게는 300명가끼이 노예를 구출했다. 이들은 교황 및 다양한 시민들에게 기부금을 받은 돈으로 노예를 구출했다. 노예들은 대부분 서민들이었고 돈키호테를 쓴 세르반테스도 있었다. 이렇게 로마 멸망 이후 사라센인의 해적질이 사회 현상이 되었다.

교육과 종교가 얼마나 강한 것이며 한편으로는 무섭다는 생각이 든다.
한번 믿기 시작하면 이를 바꾸는 것 역시 엄청 힘들며 집단 활동이 얼마나 강한 것인지 이슬람제국을 보면서 다시 느낄 수 있었다.
이슬람제국이 영토를 넓힐 수 있었던 것은 코란에 쓰여있는 글귀를 중심으로 사람들이 단합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도 든다.
이런 해적질로 인해 구출회라는 것이 생겼고 이는 인권에 대한 인식이 생겼고 한층 더 수준이 높아지는 계기가 된 것 같다.
하권에서는 어떤 흥미로운 문화적 현상이 등장할 지 궁금해진다.